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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노리프트 9화 돌아온 자리 #01 본문

넉두리, 번뇌/Play Book

크로노리프트 9화 돌아온 자리 #01

가온아 2026. 5. 1. 11:00

이틀 뒤. 하크라드.

남쪽 성벽이 먼저 보였다. 회색 돌담 위로 굴뚝 연기가 여러 줄 피어올랐다. 대장간 망치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쇠를 때리는 규칙적인 리듬. 익숙한 소리였다. 3년간 매일 들은 소리.

검은 종 여관이 보였다. 낡은 간판. 검은 종 모양이 바람에 삐걱거리며 흔들렸다. 나무가 갈라진 틈에서 페인트가 벗겨져 있었다. 술 냄새가 문 밖까지 새어나왔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카엘이 떠난 지 열닷새밖에 안 됐는데, 한 달은 지난 것 같았다.

카엘이 문에 손을 얹었다. 기름기와 땀이 배어든 오래된 나무. 손바닥이 기억하는 질감. 3년간 하루에 두 번씩 밀었던 문.

밀었다. 넬이 뒤따랐다.

안쪽은 어두웠다. 낮인데도 창이 작아서 햇빛이 제대로 들지 않았다. 구석 탁자에서 용병 둘이 주사위를 굴리고 있었다. 나무 주사위가 탁자 위에서 또르르 구르는 소리. 맥주잔이 부딪히는 소리. 천장 서까래에 매달린 등잔에서 기름 타는 냄새가 났다.

주인 노파가 카운터 뒤에 서 있었다. 살집이 좋고 눈이 날카로운 여자. 30년을 이 자리에서 버틴 사람이었다. 카운터를 행주로 닦고 있었다. 그 손이 멈췄다.

카엘을 봤다. 위아래를 훑었다. 관자놀이에서 뒤통수까지 번진 은색 머리카락. 열닷새 전에는 관자놀이에만 서너 가닥이었다. 지금은 귀 뒤까지 퍼져 있었다. 소매 아래로 보이는 왼손의 은빛 실선. 피부 아래에서 맥박치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노파의 눈이 좁아졌다. 행주를 카운터에 놓았다.

"살아서 돌아왔네."

"그랬으면 좋겠는데."

"뭔 소리야."

"물 줘."

노파가 잔을 내밀었다. 나무 잔. 잔 안쪽에 오래된 얼룩이 배어 있었다. 이 주막에서 깨끗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카엘은 물을 마셨다. 미지근했다. 마른 입안이 풀렸다.

넬을 봤다.

"방 하나 잡아. 쉬어."

넬이 고개를 끄덕이고 2층으로 올라갔다. 삐걱거리는 계단. 도끼가 등에서 가죽 끈에 걸려 흔들렸다. 노파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과묵한 남자는 이런 상황에서 편했다. 설명할 것이 없으니까.

카엘은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2층 복도 끝. 열닷새 전에 잠갔던 문. 열쇠를 돌렸다. 녹슨 자물쇠가 뻑뻑하게 돌아갔다.

문을 열었다.

삐걱거리는 마루. 갈라진 벽. 얼룩진 천장. 탁자 위에 먼지가 쌓여 있었다. 침대 위 담요는 출발할 때 던져둔 그대로였다. 창문 틀 아래에 거미줄이 쳐져 있었다. 방 안의 공기는 퀴퀴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카엘만 변했다.

창문을 열었다. 뻑뻑한 나무틀을 밀어 올렸다. 밖에서 바람이 들어왔다. 대장간의 쇠 냄새, 시장 노점의 향신료 냄새, 굴뚝 연기가 섞인 바람.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공기. 그 익숙함이 이상했다. 돌아온 곳의 냄새를 처음 맡는 것처럼.

허리춤의 라벤라 주머니에 손이 갔다. 엘시가 준 것. 코에 가져갔다. 향이 났다. 아직. 레칸 의원에게서 얻어온 라벤라. 세라의 주머니에 다른 사람이 채운 약초. 향은 같았다. 라벤더와 캐모마일. 세라가 채웠을 때와는 미세하게 달랐다. 무엇이 다른지 설명할 수 없었다.

주머니를 허리춤에 다시 꽂았다.

침대에 앉았다. 스프링이 삐걱거렸다. 검을 무릎에 세웠다. 검집의 가죽이 닳아 있었다. 유적에서 꺼낸 후 손질할 틈이 없었다. 날도 무뎌졌을 것이다.

리온은 따로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레칸에서 헤어지기 전 이미 정보망에 연락을 돌렸겠지. 발렌의 동향. 아렌의 정체. 코벤의 귀환 여부.

카엘이 할 일은 하나. 기다리기.

기다리는 건 싫었다. 정보 없이 움직이는 건 더 싫었다. 3년 전 정보 없이 움직인 결과가 37명의 죽음이었다. 발렌이 미끼로 썼다는 걸 사전에 알았더라면. 아무 소용없는 가정이었다. 그 이후로 카엘은 정보 없이 칼을 뽑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

왼손이 맥박쳤다. 유적에서 결정을 만진 이후 멈춘 적이 없었다. 잠들어도 깨어도. 손등에서 시작된 은빛 실선이 팔뚝 중간까지 뻗어 있었다. 진행되고 있다. 무엇이, 어디를 향해, 아무도 모르는 방향으로.

피로가 올라왔다. 이틀간의 행군. 다리의 근육이 뻣뻣했다. 어깨도 결렸다. 넬의 속도에 맞추느라 쉬지 않고 걸었다.

잠이 들었다.

---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창밖이 어두웠다. 잠들었었다. 목이 뻣뻣했다. 검을 세운 채 잠들어서 오른손이 검 자루를 쥔 채로 굳어 있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공기가 차가워진 걸 보면 해가 진 후 꽤 됐을 것이다.

"카엘."

도리안의 목소리였다. 낮고 굵은 목소리.

문을 열었다.

잿빛 망토. 왼쪽 눈 위 흉터. 짧은 갈색 머리. 넓은 어깨에 낡은 가죽 갑옷. 반년 전과 같은 모습이었다. 도리안의 표정이 달랐다. 입꼬리가 올라가 있지 않았다. 도리안은 보통 카엘을 보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웃는 게 아니라, 살아 있는 걸 확인했다는 표시에 가까운 것. 그게 없었다.

"들어와."

도리안이 방에 들어와 의자에 앉았다. 의자가 삐걱거렸다. 도리안의 체구에 비해 의자가 작았다. 방을 둘러봤다. 먼지 쌓인 탁자. 갈라진 벽.

카엘을 봤다.

오래 봤다. 5초. 시선이 관자놀이의 은색 머리카락에서 시작해 귀 뒤를 지나 뒤통수까지 따라갔다.

"……머리카락."

"알아."

"알아? 그게 끝이야?"

"뭘 더 말해."

도리안이 카엘의 왼손을 봤다. 소매 밖으로 드러난 손등. 은빛 실선이 피부 아래에서 맥박쳤다. 어둠 속에서도 보일 만큼. 촛불을 켜지 않은 방에서 그 빛만이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드러내고 있었다.

도리안의 눈이 좁아졌다. 왼쪽 눈 위 흉터가 그 움직임에 따라 일그러졌다. 묻지 않았다. 이 남자의 방식이었다. 상대가 말하기 전에는 파고들지 않는다. 전장에서 만들어진 신뢰.

대신 다른 말을 했다.

"도시에 소문이 돌아."

"무슨."

"발렌이 용병 하나를 찾고 있다고. 은색 머리카락의 독립 용병. 금화를 걸었다는 얘기도 있어."

카엘의 턱이 미세하게 경직됐다. 이를 물었다 풀었다. 도리안은 그 움직임을 봤을 것이다.

"얼마?"

"모르겠어. 하지만 현상금이 아니라 초빙금이라더라. 해치려는 게 아니라 데려가려는 거야."

"마찬가지야."

"……그래. 마찬가지지."

도리안이 에일을 꺼냈다. 허리춤에 매달고 온 가죽 주머니. 매듭이 단단하게 묶여 있었다. 풀어서 나무통 하나를 꺼내 두 잔에 따랐다. 호박색 액체가 나무 잔에 담겼다. 거품이 얇게 올라왔다. 에일의 쓴 냄새가 좁은 방 안에 퍼졌다.

"마셔."

"술 안 마셔."

"오늘은 마셔."

카엘은 잔을 봤다. 3년간 한 번도 안 마셨다. 세라가 죽은 후로. 세라는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 군의관이라 몸을 깨끗하게 유지하려 했다. 카엘도 그 습관을 따랐다. 세라가 죽은 후에는 습관이 아니라 규칙이 됐다. 술을 마시면 기억이 흐려질 것 같았다. 이미 흐려지고 있는 기억을 더 잃고 싶지 않았다.

잔을 들었다. 한 모금 마셨다. 쓰고 씁쓸했다. 목을 타고 내려가는 액체가 따뜻했다. 위장에 닿자 열이 퍼졌다. 별로였다.

"어떠냐?"

"별로."

"원래 에일이 그래."

도리안이 자기 잔을 기울이며 한 모금 마셨다. 익숙한 동작.

"카엘. 직접적으로 물을게."

"그래."

"네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어?"

카엘은 에일 잔을 내려다봤다. 액체 표면에 촛불이 아닌, 왼손의 은빛이 반사됐다. 호박색 에일 위에 은색 맥박. 이상한 조합이었다.

"모르겠어."

"거짓말 아니지?"

"진짜 몰라."

도리안은 카엘을 봤다. 5초. 흉터가 있는 왼쪽 눈과 멀쩡한 오른쪽 눈. 두 눈의 온도가 달랐다. 왼쪽이 더 깊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모르는 거면 어쩔 수 없지."

"……그래."

"근데 하나만 말해줄게."

도리안이 잔을 내려놓았다. 나무 잔이 탁자 위에 놓이는 둔탁한 소리.

"어제 잿빛 여단에 칼레온 병사 셋이 왔어. 발렌의 문장을 단. 여단에 '은색 머리카락의 용병'을 본 적 있냐고 물었어."

카엘의 손가락이 잔 위에서 멈췄다. 에일의 표면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잔을 잡은 손가락의 떨림 때문인지, 왼손의 맥박 때문인지 구분이 안 됐다.

"뭐라 했어?"

"모른다고 했지."

"그러면 여단이 위험해져."

"알아."

도리안이 카엘을 봤다. 카엘의 왼손에서 나오는 은빛이 도리안의 흉터 위에 얇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래서 온 거야. 경고하러. 네가 아니라 나를 위해."

카엘은 입을 다물었다. 도리안은 거짓말을 안 하는 남자다. 나를 위해 왔다고 하면 정말 그런 거다. 잿빛 여단은 하크라드에서 가장 큰 용병 조직이었다. 발렌과 엮이면 여단 전체가 위험해진다. 도리안이 부단장으로서 여단을 지켜야 하는 건 당연했다.

카엘은 알았다. 경고만 하려면 사람을 보내면 된다. 부하 하나 시키면 될 일이었다. 직접 온 건 다른 이유가 있다. 카엘의 얼굴을 보려고 온 것이다. 머리카락이 은색으로 변하고, 손등에 빛이 맥박치고, 열닷새 만에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온 옛 전우의 얼굴을.

물어보지 않는 게 도리안의 방식이라면, 와서 보는 게 도리안의 진심이었다.

"도리안."

"뭐."

"나 때문에 여단이 엮이면 안 돼."

"알아."

"하크라드를 떠날 거야."

도리안의 잔이 멈췄다. 입에 가져가다 만 잔이 공중에서 3초간 머물렀다. 천천히 내려왔다.

"언제?"

"리온이 정보를 가져오면."

도리안은 에일을 마저 마셨다. 잔 안의 에일을 남기지 않고 비웠다. 잔을 탁자에 놓고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밀리며 마루가 삐걱거렸다.

"어디로?"

"모르겠어. 칼레온 밖으로."

"노르비스?"

"아마."

도리안이 잿빛 망토를 여미며 문 쪽으로 걸었다. 망토 아래에서 낡은 가죽 갑옷이 보였다. 3년 전에도 입고 있던 것. 기워진 자국이 두세 군데. 새 갑옷을 살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 갑옷이 자기를 살려줬다고 믿는 남자였다.

문고리에 손을 얹고 멈췄다.

돌아보지 않았다.

"에일 맛은 어땠어?"

"별로라고 했잖아."

"다음에 또 마시자."

카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음이 있을지 몰랐으니까. 노르비스로 건너가면 칼레온에 돌아오기 어렵다. 발렌이 찾고 있는 이상, 국경을 넘는 순간 돌아오는 길은 닫힌다.

"죽지 마."

도리안이 나갔다. 문이 닫혔다. 발소리가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갔다.

같은 말. 반년 전 에일을 마시고 헤어질 때와 같은 말. 이번에는 무게가 달랐다. 반년 전에는 언제든 다시 볼 수 있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카엘은 빈 잔을 봤다. 에일 자국이 잔 안쪽에 남아 있었다. 호박색 얼룩이 나무에 스며들어 있었다. 도리안의 자리에 놓인 빈 잔도 같았다. 두 개의 빈 잔. 탁자 위에 나란히.

왼손의 맥박이 느려졌다. 도리안이 떠나고 나서야. 이유를 몰랐다. 사람이 가까이 있을 때 반응이 강해지는 건지, 감정에 따라 변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