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보자, 하늘.
크로노리프트 8화 사냥개 #01 본문
레칸까지 하루 반.
균열지대를 빠져나오자 발밑이 달라졌다. 갈라진 바위가 끝나고 흙이 시작됐다. 마른 흙이었다. 풀은 아직 드물었지만, 부츠 밑창에 닿는 감촉이 달랐다. 유적 안의 돌바닥도, 균열지대의 자갈밭도 아닌, 흙. 평범한 흙. 그 평범함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열이틀 전에는 느끼지 못했을 감각이었다.
부상자 둘. 엘시의 종아리, 볼턴의 무릎. 카엘이 번갈아 업고 걸었다. 넬이 전위, 리온이 후위. 하르만 박사는 안경 없이 넬의 등을 따라 걸었다. 박사의 발이 돌부리에 걸릴 때마다 넬이 한 팔을 뻗어 잡았다. 말없이. 넬은 그렇게 했다. 말 대신 팔이 먼저 움직이는 남자였다.
볼턴을 업고 있을 때는 무거웠다. 60대 남성의 체중이 등에서 어깨로 내려왔다. 부러진 무릎에서 열이 났다. 카엘의 등에 닿는 부위가 뜨거웠다. 볼턴은 이를 악물고 신음을 삼켰다. 자존심이 강한 노인이었다. 업히는 것 자체가 굴욕이었을 것이다.
"……미안하네."
볼턴이 한 번 중얼거렸다. 회색 수염이 카엘의 어깨에 닿았다.
"됐어."
그게 전부였다. 볼턴은 더 말하지 않았다. 카엘도.
엘시를 업었을 때였다. 등에서 체온이 전해졌다. 작고 가벼운 몸이었다. 볼턴의 절반도 되지 않는 무게. 로브 소매가 카엘의 목 옆에 닿았다. 천이 거칠었다. 유적에서 찢어지고 먼지가 묻은 천.
엘시의 손이 카엘의 어깨를 잡았다. 떨어지지 않으려 힘을 주는 손가락. 작은 손이었다. 손가락 마디가 쇄골 위를 눌렀다.
세라의 손 온도가 떠올랐다. 따뜻했다. 항상 따뜻한 손이었다. 군의관의 손. 칼이 아닌 붕대를 쥐는 손. 얼굴은 떠오르지 않았다. 윤곽이 흐릿했다. 눈 색깔은 더욱.
엘시의 손은 달랐다. 다른 온도. 다른 손. 세라보다 조금 차가웠다. 손가락이 더 가늘었다. 마법사의 손이었다.
불편하지 않았다. 그것이 더 불편했다. 다른 사람의 체온이 등에 닿는 것에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편이 나았다. 느끼지 않는 것에 익숙했다. 그런데 불편하지 않다는 건, 무언가를 느끼고 있다는 뜻이었다.
카엘은 이를 악물고 걸었다. 앞만 봤다. 넬의 등. 도끼가 가죽 끈에 걸려 흔들리는 것. 그것만 봤다.
---

레칸 마을.
오후. 흐린 하늘 아래 돌담 울타리가 보였다. 목조 건물 서너 채. 굴뚝에서 연기가 올라왔다. 균열지대의 메마른 바위 냄새가 아닌, 나무 타는 냄새와 풀 냄새. 마을의 냄새.
마을에 들어서는 순간 카엘이 멈췄다.
사람이 없었다. 주막 문이 반쯤 열려 있었지만 소리가 나지 않았다. 주막 앞 나무 의자가 뒤집혀 있었다. 물통이 바닥에 엎질러져 있었다. 물이 흙에 스며들어 검은 자국을 남겼다. 아직 마르지 않은 물. 얼마 안 된 것이다.
등에 업힌 엘시의 손이 어깨를 더 세게 쥐었다. 엘시도 느낀 것이다.
"리온."
"들려. 주막 뒤에 말 세 마리. 안장 달린. 타고 온 지 얼마 안 됐어. 말의 코를 잡고 있는 사람이 하나. 주막 안에 셋."
리온의 금색 눈이 좁아져 있었다. 반엘프의 귀가 읽어낸 정보. 손가락이 허벅지 옆에서 두드려졌다. 위험 신호.
기마병.
카엘은 엘시를 내려놓았다. 조심스럽게. 발이 땅에 닿자 엘시의 종아리 상처가 당겼는지 얼굴을 찡그렸다. 비명은 삼켰다.
"넬. 나머지 데리고 마을 밖으로."
넬은 묻지 않았다.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볼턴을 어깨에 걸치고 돌아섰다. 볼턴이 신음했지만 넬은 멈추지 않았다. 하르만 박사가 넬의 뒤를 따랐다.
엘시가 따라가려다 카엘을 봤다. 주근깨가 있는 얼굴이 긴장으로 창백했다.
"조심하세요."
카엘은 고개만 끄덕이고 주막으로 걸었다. 검 자루에 오른손을 올렸다. 뽑지는 않았다. 아직.
문을 밀었다. 나무 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안쪽의 공기가 밖과 달랐다. 가죽 냄새. 쇠 냄새. 기름 냄새. 말을 오래 탄 사람의 냄새.
세 명이 앉아 있었다.
둘은 칼레온 문장을 단 병사. 가죽 흉갑에 발렌 가문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쌍검 위에 매가 앉은 문양. 카엘이 3년 전까지 달고 다녔던 것과 같은 문장. 병사들의 손은 탁자 위에 올라가 있었지만, 시선이 문 쪽을 향해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주민 네다섯이 구석에 몰려 있었다. 주막 주인이 카운터 뒤에서 얼굴이 굳어 있었다. 아이를 안은 여자가 구석 탁자 밑에 웅크리고 있었다. 공포가 아니었다. 체념에 가까운 침묵. 변방 마을 사람들은 병사가 오면 이렇게 됐다. 저항해봤자 소용없다는 걸 경험으로 아는 표정.
세 번째.
카운터에 앉은 여자. 짧은 흑발. 창백한 피부. 검은 로브. 로브 아래에서 비정상적으로 가는 손가락이 나무 카운터 위에 놓여 있었다. 왼쪽 손목에 문양이 보였다. 원 안에 삼각형, 그 안에 다시 원.
카엘이 들어서자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느린 동작이었다.
눈이 마주쳤다. 어두운 갈색.
왼손이 뜨거워졌다. 갑자기. 예고 없이. 은빛이 맥박치기 시작했다. 강하게. 유적 밖에서 이렇게 강하게 반응한 적은 없었다. 손등의 실선이 소매 아래에서 빛났다. 통제할 수 없었다. 켤 수도 끌 수도 없는 빛.
여자가 카운터에서 내려왔다. 로브 자락이 바닥을 스쳤다. 발소리가 나지 않았다.
"반갑습니다. 카엘 씨."
낮고 차분한 목소리. 감정이 삭제된 톤. 어떤 기대도 경계도 없는. 감정을 지운 것이 아니라, 감정이 있는 곳까지의 거리가 먼 사람의 목소리.
"저는 아렌. 발렌 영주님의 특무관입니다."
카엘의 오른손이 검 자루를 잡았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가죽 감개의 감촉이 손바닥에 파고들었다.
발렌.
이름만으로 충분했다. 3년 전. 노르비스 국경. 37명의 부하. 세라. 전부 그 이름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가슴 안쪽에서 차가운 것이 올라왔다. 분노가 아니었다. 분노는 뜨겁다. 이건 차가웠다. 3년간 얼려둔 것이 그대로 있는 감각.
"발렌이 보낸 거야."
"네."
숨기지 않았다. 코벤과 달랐다. 코벤은 정중한 말투로 목적을 감췄다. 이 여자는 목적을 드러낸 채 정중했다.
아렌이 로브 안에서 수정구를 꺼냈다. 주먹 크기. 투명한 수정 안에서 청백색 빛이 희미하게 맥박쳤다. 유적의 결정과 비슷한 색이었다. 카엘의 왼손이 더 뜨거워졌다. 수정구의 맥박과 왼손의 맥박이 비슷한 간격이었다.
"한 달 전부터 하크라드 일대에서 이상한 에너지가 감지됐어요. 이 수정구로. 마나가 아닌, 분류할 수 없는 것이."
"그게 나라는 거야?"
"정확히는 몰라요. 하지만 당신 근처에서 반응이 가장 강했어요."
카엘은 아렌을 봤다. 차갑지만, 그 아래에 뭔가가 있었다. 호기심. 아니, 그것보다 깊었다. 오랫동안 혼자 가지고 있던 것을 처음으로 다른 사람에게서 본 사람의 눈. 갈망에 가까운 것.
병사 둘은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검에 손을 대지도 않았다. 아렌이 시키지 않았기 때문인지, 시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인지. 아렌은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병사가 장식이라는 뜻이었다.
"코벤의 보고서가 도착하기 전에 왔습니다. 코벤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러면 유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거야."
"모르죠. 하지만 알 필요도 없었어요."
아렌이 미소 지었다. 얇은 입술이 휘어졌다. 웃음이 눈까지 가지 않았다. 입만 웃는 사람.
"영주님은 유적보다 당신에게 관심이 있으니까."
"왜?"
"역사에 기록된 사람이 있어요. 아주 드물게. 다른 이들과는 다른 힘을 다뤘다는 사람들. 기록은 파편적이고, 신체적 특징도 알려진 바 없어요. 대부분은 자기가 뭘 가졌는지도 모르고 죽었겠죠."
아렌이 한 발 다가왔다. 카엘의 왼손이 더 뜨거워졌다. 손가락이 저렸다. 혈관 안에서 무언가가 흐르는 느낌.
"하지만 가끔, 아주 가끔. 자각하는 사람이 있어요."
"당신도?"
카엘이 짧게 물었다.
아렌이 멈췄다. 0.5초의 정적. 주막 안의 소리가 전부 사라진 것 같은 찰나. 구석에 웅크린 주민들의 숨소리. 카운터 뒤 주인의 침. 병사 하나의 의자가 삐걱거리는 소리. 전부 들렸지만, 아렌의 침묵이 더 컸다.
"……비슷한 것 같기도 해요."
확신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아렌의 목소리에서 단정이 빠졌다. 감정이 삭제된 톤이 아니라, 감정을 모르는 톤이었다. 자기 안에 있는 것의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사람의 목소리.
"저한테도 설명할 수 없는 게 있어요. 이 수정구가 반응하는 것도, 제가 당신을 감지할 수 있었던 것도. 정확히 뭔지는 몰라요. 아무도 가르쳐준 적이 없으니까."
카엘은 검 자루를 더 세게 쥐었다. 가죽 감개가 삐걱거렸다. 이 여자는 발렌의 사람이다. 발렌이 보낸 특무관이다. 방금 그 목소리는 거짓이 아니었다. 거짓이라면 더 확신에 찬 말을 했을 것이다. 모르는 척하면서 확실하게 말하는 것이 속이는 사람의 방식이다. 아렌은 반대였다.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 모른다고 말했다.
카엘과 같은.
"전하러 온 겁니다. 영주님께서 카엘 씨와 만나고 싶어하십니다."
"거절이야."
한 마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예상했어요."
거절에 놀라지 않은 것이 아니라, 거절을 전제로 온 사람의 반응이었다.
아렌이 수정구를 로브 안에 넣었다. 왼손의 열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맥박이 느려졌다. 우연이 아니었다. 수정구와 왼손 사이에 뭔가가 있었다.
아렌이 문 쪽으로 걸었다. 카엘의 옆을 지나갈 때 멈췄다. 가까운 거리. 아렌의 로브에서 냄새가 났다. 나무가 아닌 냄새. 금속도 아닌 냄새. 유적 안의 공기와 비슷했다. 혀끝이 저리는 것 같은.
"하나만."
낮은 목소리. 병사들에게 닿지 않을 음량.
"당신 손등의 은빛. 제가 처음 본 건 아니에요."
카엘이 아렌을 봤다. 옆얼굴. 가까이서 보니 피부 아래에 혈관이 비쳐 보일 만큼 창백했다. 짧은 흑발이 귀 뒤로 넘겨져 있었다. 귀 뒤에 작은 흉터. 오래된 것.
"옛날에 한 사람을 봤어요. 비슷한 게 있었던 사람. 그 사람은 결국 자기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끝내 알지 못했어요."
아렌의 눈에 감정이 스쳤다. 0.5초. 무엇인지 읽기 전에 사라졌다.
"당신은 달랐으면 좋겠어요."
아렌이 지나갔다. 로브 자락이 카엘의 바지에 스쳤다. 병사 둘이 의자에서 일어나 뒤를 따랐다. 가죽 갑옷이 부딪히는 소리. 무거운 발소리. 주막 문이 열리고 닫혔다.
말발굽 소리가 시작됐다. 세 마리. 흙을 차는 소리가 빨라지다 멀어졌다. 남쪽으로. 하크라드 방향으로.
카엘은 주먹을 폈다. 은빛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손바닥에 손톱 자국이 찍혀 있었다. 네 개의 초승달 모양. 피가 나지는 않았지만 자국이 깊었다. 언제 이렇게 세게 쥐었는지 몰랐다.
"괜찮아?"
리온이 물었다. 주막 문 밖에서. 들어오지 않은 것은 카엘의 판단을 존중한 것이다. 하지만 밖에서 전부 들었을 것이다. 반엘프의 귀.
"모르겠어."
---
마을 의원이 엘시와 볼턴을 치료했다.
작은 돌집이었다. 약초 냄새가 벽에 배어 있었다. 선반에 유리병이 늘어서 있었다. 갈색, 초록색, 투명한 액체. 의원은 마른 중년 남자였다. 안경을 코끝에 걸치고 있었다. 말이 적었다. 상처를 보고 필요한 것만 물었다.
엘시의 종아리에서 파편을 빼고 봉합했다. 엘시가 이를 악물었다. 눈물이 고였지만 소리를 내지 않았다. 카엘은 문 앞에 서서 봤다. 볼 생각은 없었지만, 의원의 집이 좁았다. 유적 안에서 울 때와는 달랐다. 그때는 공포에 질려 울었다. 지금은 아프니까 참는 것이었다.
볼턴의 무릎은 금이 가 있었다. 부목을 댔다. 한 달은 걸린다고 했다. 볼턴이 입술을 비틀었다. 60년 동안 마법을 쓰며 살아온 마법학 석좌교수가 부목을 대고 누워 있어야 한다. 마법이 되는 곳이라면 치유술로 사흘이면 낫는 부상이었다. 레칸에 치유 마법사는 없었다. 변방 마을에 그런 사치는 없었다.
주막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저녁.
카엘은 주막 2층 창가에 앉았다. 레칸 마을의 밤. 별이 보였다. 균열지대와는 다른, 정상적인 하늘. 별의 위치가 맞았다. 계절에 맞는 별자리가 제자리에 있었다. 균열지대에서는 하늘조차 믿을 수 없었다. 여기는 달랐다. 정상적인 하늘 아래에서 정상적이지 않은 손을 보고 있었다.
왼손을 펴봤다. 은빛 실선이 팔뚝까지. 손등에서 시작된 선이 손목을 지나 팔뚝 안쪽을 따라 올라갔다. 열닷새 전보다 길어졌다. 유적에서 결정을 만진 이후. 아렌이 말한 것이 맞다면, 이것은 계속 퍼진다.
어깨를 넘으면 기억이 섞인다. 이미 그 증상이 있었다. 결정을 만진 후 세라의 기억과 비전이 뒤섞였다. 호박색 눈이 세라의 것인지 비전 속 여자의 것인지 구분이 안 됐다. 하늘이 갈라지는 장면과 세라의 미소가 같은 순간에 겹쳐 떠올랐다.
진행되고 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카엘 씨."
엘시의 목소리. 카엘은 잠깐 망설이다 문을 열었다.
엘시가 서 있었다. 오른쪽 다리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나무 지팡이를 짚었다. 한 손에 약초 주머니. 작은 천 주머니. 실로 엮은 것.
복도의 등잔불이 엘시의 얼굴을 비췄다. 주근깨가 보였다. 코 양쪽과 양 볼에. 유적의 어둠 속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
"이거."
엘시가 주머니를 내밀었다.
"뭐야?"
"라벤라. 마을 의원한테 얻었어요. 카엘 씨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거, 비슷한 거잖아요. 향이 안 나는 거 같았는데."
카엘은 주머니를 받았다. 엘시의 손가락이 잠깐 닿았다. 차가운 손끝. 밤 공기에 식은 것이다.
코에 가져갔다.
향이 났다. 보라색 꽃의 달콤하고 쓴 향. 라벤더의 진한 향이 먼저 왔고, 캐모마일의 부드러운 뒷맛이 따라왔다. 코끝을 지나 머리 뒤쪽까지 퍼지는 향.
3주 만이었다. 에테르가 각성한 이후 세라의 라벤라 주머니에서 향이 급속히 사라졌다. 새 약초로 교체해도 하루 만에 무향이 됐다. 세라의 주머니에서 세라의 향이 사라진다. 그것이 카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카엘은 말로 만들지 않았다.
"왜?"
"그냥요."
"그냥은 없어."
엘시가 웃었다. 유적 안에서 울던 얼굴과는 다른, 주근깨가 보이는 웃음. 입꼬리가 양쪽으로 올라가는, 감추지 않는 웃음. 등잔불 아래에서 갈색 눈이 반짝였다. 밝은 갈색이었다. 호박색이 아니었다. 세라의 눈과는 다른 색.
"등에 업혀서 갈 때 허리춤에서 주머니가 보였거든요. 많이 닳아 있었어요. 매일 만지는 것처럼. 실밥이 풀려 있고, 천이 얇아져 있고. 근데 향이 하나도 안 나더라고요."
카엘은 라벤라 주머니를 봤다. 손안의 새 주머니. 실이 단단하게 엮인. 천이 아직 빳빳한.
"중요한 거잖아요. 그 주머니."
카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면 세라 얘기를 해야 했다. 세라의 이름을 입 밖에 꺼내는 것. 3년 동안 리온에게도 하지 않은 일이었다. 리온은 알고 있었지만, 카엘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온 적은 없었다. 묻지 않는 것이 둘 사이의 규칙이었다.
"감사는 안 해도 돼요. 미끼로 써진 사람한테 라벤라 값 정도는 받아야죠."
엘시가 웃으며 돌아섰다. 지팡이를 짚고 복도를 절뚝거리며 걸어갔다. 나무 지팡이가 마루를 찍는 소리. 걸음마다 한 박자씩. 봉합한 종아리를 딛지 않으려고 몸을 기울이며 걷는 모습이 복도 끝까지 보였다.
카엘은 문 앞에 서서 엘시의 뒷모습을 봤다.
짧은 갈색 머리카락이 등 위에서 흔들렸다.
세라도 갈색 머리카락이었다.
카엘은 문을 닫았다. 라벤라 주머니를 코에 대고 숨을 들이쉬었다. 깊게. 향이 폐까지 내려갔다. 보라색 꽃의 달콤함과 쓴맛이 몸속에 퍼졌다. 3주 만에 맡는 향. 다른 사람이 채운, 같은 약초의, 같은 향.
눈이 뜨거워졌다. 시야가 흐려졌다.
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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