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보자, 하늘.
크로노리프트 7화 미끼 #02 본문
넬은 소리를 들었다.
돌이 무너지는 소리. 위에서. 아래에서. 사방에서. 벽의 금이 눈에 보이는 속도로 번지고 있었다.
넬은 하르만 박사의 손을 잡고 달렸다. 넬의 손이 먼저 움직였다. 말보다 빨랐다.
"빨리!"
"가, 가고 있어요!"
박사가 헐떡이며 달렸다. 안경은 진즉에 잃어버렸다. 앞이 흐릿한 상태로 넬의 손만 잡고 달렸다. 넬의 넓은 등이 어둠 속에서 흔들리는 것이 유일한 지표였다.
통로 천장에서 돌이 떨어졌다. 사람 머리만 한 크기. 넬이 박사를 밀치며 피했다. 돌이 넬의 어깨를 스쳤다. 도끼를 맨 쪽 어깨. 가죽 끈이 찢어지면서 충격을 일부 흡수했다. 피가 났지만 멈추지 않았다.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앞에 빛이 보였다. 청백색. 카엘의 빛.
통로 끝에서 빛이 다가왔다. 빠르게.
카엘이었다.
달리고 있었다. 은빛 머리카락이 빛 속에서 흔들렸다. 검을 쥐고. 눈이 어둠 속에서도 초점을 잃지 않았다. 전장에서의 눈.
"출구는 위야! 경사로를 올라가!"
카엘이 소리쳤다. 지나치며.
넬이 방향을 바꿨다. 카엘이 가리킨 쪽으로. 카엘이 지나온 길을 거꾸로 올라가는 것이다. 넬은 묻지 않았다. 카엘이 말하면 그 방향이 맞았다.
"박사. 넬. 먼저 올라가."
"코벤이랑 교수님은?"
하르만 박사가 물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눈이 흐린 채로 카엘의 빛만 보고 있었다.
"찾아야 해."
"어디에——"
천장에서 돌이 떨어졌다. 크게. 통로 폭 절반을 막을 만한 크기. 박사가 비명을 질렀다. 넬이 박사를 잡아끌며 피했다. 한 팔로 박사의 허리를 감싸 반대편 벽으로 몸을 던졌다.
"가! 지금!"
카엘이 고함쳤다.
넬이 박사를 끌고 경사로를 올라갔다. 카엘의 빛이 경사로를 비췄다. 카엘에게서 멀어질수록 빛이 약해졌지만, 경사로의 끝에 자연광이 보였다. 누런빛. 충분했다.
카엘은 돌아서서 반대쪽 통로로 뛰었다.
코벤과 볼턴이 갔을 방향. 리온이 말했던 반대편. 넬과 하르만은 경사로를 올라가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 두 사람이었다.
통로가 흔들렸다. 더 심하게. 벽에서 금이 갔다. 금이 거미줄처럼 퍼지며 먼지가 쏟아졌다. 천장의 결정이 떨어졌다. 날카로운 파편이 공기를 갈랐다. 하나가 카엘의 팔뚝을 스쳤다. 가죽 위에 긴 자국이 났지만 피부까지는 닿지 않았다. 카엘은 떨어지는 돌을 피하며 달렸다. 검을 든 오른손이 벽의 돌출부를 쳐내며 길을 뚫었다. 검날에 돌가루가 묻었다. 충격이 손목에서 팔꿈치까지 울렸다. 통로 바닥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수평이 무너졌다. 유적의 골격이 찌그러졌다.
200미터.
소리가 들렸다.
"살려——"
볼턴의 목소리였다. 갈라지고 찢어진 비명. 공포와 고통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소리.
카엘은 소리를 향해 뛰었다.
통로 끝. 갈림길이 있었다. 왼쪽 통로가 반쯤 무너져 있었다. 천장이 내려앉아 돌더미가 쌓여 있었다. 먼지 사이에서 회색 수염이 보였다. 볼턴이었다.
하반신이 돌에 깔려 있었다.
"교수."
카엘이 달려가 돌을 치웠다. 하나, 둘, 셋. 팔 굵기만 한 돌. 양손으로 잡아 옆으로 던졌다. 볼턴의 다리 위에 더 큰 돌이 있었다. 어른 가슴팍만 한 돌덩이. 혼자 들 수 있는 무게가 아니었다.
"코벤은?"
카엘이 물었다.
볼턴의 입술이 떨렸다.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회색 수염에 먼지가 하얗게 묻어 있었다.
"……갔어."
"뭐?"
"무너지기 시작하니까 혼자 뛰어갔어. 나를 두고."
볼턴의 목소리에 분노는 없었다. 비었다. 체력도, 분노도, 기대도 전부 바닥난 사람의 목소리. 눈에 눈물이 고였지만 흐르지는 않았다.
카엘은 그 목소리를 들었다. 전장에서 들었던 소리와 같았다. 버림받은 병사의 소리. 부대가 후퇴하고 혼자 남겨진 병사가 내는 소리. 3년 전에도 들었다. 37번. 혹은 그 이상.
카엘은 볼턴의 다리 위 돌을 봤다. 검을 지렛대로 쓸 수 있을까. 아니다. 검이 부러진다.
주변을 봤다. 무너진 벽 사이에 긴 돌기둥 조각이 있었다. 2미터쯤. 벽을 지탱하던 기둥의 일부가 부러져 나온 것이었다. 카엘은 그걸 끌어와 볼턴의 다리 옆 틈에 끼웠다.
지렛대.
체중을 실었다. 양손으로 돌기둥 끝을 누르고 다리 힘을 더했다. 돌기둥이 삐걱거렸다. 팔뚝의 혈관이 솟았다. 돌이 1센티미터 올라갔다.
"다리. 빼."
"못 움직여——"
"빼라고."
카엘이 이를 악물고 더 밀었다. 허리에서 어깨까지 모든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돌이 3센티미터 올라갔다. 그 틈 사이로 볼턴이 비명을 지르며 상체의 힘만으로 몸을 뒤로 끌었다. 팔꿈치로 바닥을 긁으며.
다리가 빠져나왔다.
카엘이 돌기둥에서 손을 떼자 돌이 바닥에 떨어졌다. 쿵. 통로 전체가 울렸다.
볼턴의 오른쪽 다리. 무릎 아래가 부어 있었다. 색이 검붉게 변해 있었다. 부러진 건지 으깨진 건지. 만지면 안 되는 상태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걸을 수 있어?"
"……모르겠어."
카엘은 볼턴을 일으켜 어깨에 걸쳤다. 엘시보다 무거웠다. 60대 남성의 무게. 뼈와 살의 무게가 어깨에서 허리로 내려왔다. 볼턴의 숨이 카엘의 귀 옆에서 거칠게 들렸다. 카엘은 전장에서 갑옷 입은 병사를 끌어본 적이 있다. 이것보다 더 무거운 것을. 더 먼 거리를.
"가자."
"코벤 그 자식은——"
"나중에."
볼턴이 말을 삼켰다. 카엘의 어깨를 잡았다. 손에 힘이 없었다. 마법이 있었을 때와 다른 손이었다. 60년간 지팡이를 쥐고 마나를 다루던 손이 지금은 28살 용병의 어깨에 매달린 채 흔들렸다.
천장에서 돌이 떨어졌다. 카엘의 왼쪽 1미터. 파편이 튀어 뺨을 스쳤다. 카엘은 피하며 달렸다. 볼턴을 어깨에 짊어진 채. 볼턴의 부러진 다리가 흔들릴 때마다 신음이 등 뒤에서 들렸다. 경사로를 향해.
왼손의 은빛이 맥박쳤다. 길을 비췄다. 유적이 꺼져가는 와중에도 카엘의 발밑에서만 마지막 빛이 남았다. 벽면의 문양이 카엘이 지날 때만 잠깐 살아났다 죽었다.
쓸모없는 빛이 아니었다.
이 순간만은.
---
바위틈.
자연광이 보였다.
카엘은 볼턴을 밀어 틈으로 넣었다. 볼턴이 비명을 지르며 빠져나갔다. 부러진 다리가 바위에 걸렸다. 바깥에서 넬이 볼턴의 팔을 잡아 끌어냈다. 말없이. 넬은 이미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다.
카엘이 틈으로 나왔다. 마지막으로. 바위 사이가 좁아지고 있었다. 등을 긁으며 나왔다. 옷이 찢어지는 감촉이 있었지만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바깥이었다. 균열지대의 하늘. 흐린 하늘.
뒤에서 바위가 무너졌다. 카엘이 나온 지 3초 후. 틈이 닫혔다. 돌과 돌이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연쇄적으로 울렸다. 돌먼지가 피어올랐다. 유적의 마지막 숨이 먼지가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천 년의 역사가 회색 분진이 되어 바람에 흩어졌다.
유적이 닫혔다.
카엘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이 귀에서 뛰었다. 팔이 떨렸다. 등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왼손의 은빛이 약하게 깜빡였다. 멈추지 않는 맥박.
리온이 달려왔다.
"카엘——"
"됐어."
카엘이 손을 들었다.
주변을 봤다. 넬이 볼턴을 바닥에 눕히고 다리를 살피고 있었다. 넬의 넓은 손이 조심스럽게 무릎 주변을 눌러봤다. 표정이 없었지만 손은 부드러웠다. 하르만 박사가 옆에 앉아 있었다. 안경 없이 세상이 흐린 채로. 엘시가 볼턴에게 기어가며 "교수님" 하고 불렀다. 목소리가 떨렸다.
리온. 엘시. 볼턴. 넬. 하르만 박사.
다섯.
"코벤은?"
리온이 물었다.
카엘은 바위를 봤다. 닫힌 틈. 돌먼지가 가라앉고 있었다.
"못 찾았어."
"안에 있어?"
"모르겠어. 볼턴을 두고 먼저 뛰었다고 했어. 어디로 갔는지는."
리온이 닫힌 바위를 봤다. 다시 들어갈 수 없었다.
"죽었을까?"
카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코벤이라는 남자를 떠올렸다. 정중한 말투. 계산하는 눈. 가장 먼저 뛰어드는 다리. 서류 가방을 놓지 않는 손.
"살아 있을 거야."
카엘이 말했다.
"왜?"
"그런 놈은 안 죽어."
리온이 피식 웃었다. 웃음에 힘이 없었다. 웃음이었다. 금색 눈이 가늘어졌다. 피로와 안도가 동시에 밀려오는 얼굴이었다.
엘시가 볼턴의 손을 잡고 있었다. 볼턴이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엘시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하르만 박사가 로브 소매를 찢어 넬에게 건넸다. 넬이 그 천으로 볼턴의 다리를 고정했다. 말없이. 넬의 손은 굵고 투박했지만, 부상을 다루는 동작은 정확했다.
카엘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흐린 하늘. 균열지대의 메마른 바람이 은색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바람에 땀이 식었다. 피부 위에서 열이 빠져나갔다.
왼손의 은빛이 유적 밖에서도 맥박쳤다. 약하게. 분명하게. 결정이 없는 곳에서. 유적이 닫힌 뒤에도.
유적은 닫혔다. 결정은 죽었다.
카엘의 몸속에 있는 것은 꺼지지 않았다.
유적이 있든 없든. 결정이 있든 없든.
카엘은 왼손을 쥐었다. 은빛이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왔다. 쥐어도 꺼지지 않았다. 펴도 사라지지 않았다. 자기 것인데 자기 말을 듣지 않는 것. 11년 동안 잠들어 있다 깨어난 것이 다시 잠들 생각이 없는 것.
바람이 불었다. 균열지대의 메마른 바람. 먼지와 돌가루의 냄새. 그 너머에 희미하게 풀 냄새가 섞여 있었다.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레칸 쪽. 살아 있는 것들이 있는 방향.
카엘은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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