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보자, 하늘.
크로노리프트 6화 인간이라는 괴물 #02 본문
리온이 볼턴의 팔을 잡았다. 볼턴의 팔이 가벼웠다. 근육이 빠진 팔. 오른쪽 벽면을 따라 최대한 석상에서 먼 경로로. 벽에 등을 붙이고 옆으로 이동했다. 볼턴의 발이 바닥을 끌며 소리를 냈다. 석상의 귀가 있다면 들을 수 있는 소리.
코벤은 리온 뒤에 붙었다. 다친 어깨를 감싸 쥔 채. 리온과 볼턴보다 반 발짝 뒤에. 가장 안쪽. 석상에서 가장 먼 위치.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이지만, 리온은 코벤이 위치를 선택했다는 걸 알았다.
엘시는 반대쪽 통로 입구에 섰다. 유리병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두 손이 비었다. 손가락을 펴고 쥐었다. 주먹을 만들었다 풀었다. 떨리는 손을 달래는 동작이었다.
숨을 들이쉬었다. 가슴이 부풀었다 내려갔다. 한 번 더. 입이 열렸다.
"야——! 여기——!"
소리가 방을 울렸다. 돌벽에 부딪힌 메아리가 겹쳐졌다.
석상의 머리가 올라갔다.
돌이 돌에 부딪히는 소리. 갈리는 소리. 목뼈에 해당하는 관절이 움직이는 소리였다. 밋밋한 돌 얼굴. 이목구비가 없는 표면. 눈도, 코도, 입도 새겨져 있지 않은 타원형의 돌덩어리. '보고 있었다'. 고개가 엘시 쪽을 향해 있었다. 보이지 않는 눈이 보고 있었다.
석상이 일어섰다. 2미터의 돌이 천천히 펴졌다. 무릎 관절이 꺾이며 바닥을 밀었다. 양손이 바닥에서 떨어졌다. 등이 펴졌다. 돌이 돌에 갈리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가슴의 붉은 결정이 밝아졌다. 탁한 빛이 짙어지며 맥박을 시작했다.
엘시 쪽을 향해.
"지금이야!"
리온이 볼턴을 끌고 달렸다. 벽을 따라. 석상의 등 뒤로. 볼턴의 발이 바닥에 걸렸다. 석판의 이음새. 비틀거렸다. 리온이 잡아챘다. 볼턴의 팔꿈치가 리온의 갈비뼈에 부딪혔다. 아팠지만 놓지 않았다.
석상이 엘시를 향해 걸었다. 한 걸음. 바닥이 울렸다. 석판에 금이 갔다. 2미터의 돌덩이가 한 발을 내딛는 무게.
"물러나——!"
리온이 소리쳤다.
엘시가 뒤로 물러섰다. 통로 안으로. 발이 걸렸다. 비틀거리면서도 뒤로 갔다. 석상이 팔을 올렸다. 관절이 갈리는 소리. 어깨에서 팔꿈치, 팔꿈치에서 손목까지 차례로 펴지며 올라갔다.
내려쳤다.
돌 주먹이 통로 입구를 때렸다. 천장이 갈라졌다. 돌 파편이 쏟아졌다. 먼지가 폭발하듯 일어났다. 녹색빛이 먼지에 삼켜졌다.
엘시가 비명을 질렀다. 통로 안쪽으로 넘어졌다. 파편이 다리를 때렸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오른쪽 종아리에 돌이 박혔다.
"엘시!"
볼턴이 외쳤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60년 동안 듣지 못한 종류의 비명이 볼턴의 입에서 나왔다.
리온이 볼턴을 반대편 통로에 밀어 넣었다. 볼턴이 비틀거리며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코벤은 이미 안에 들어가 있었다. 가장 먼저. 가장 빠르게. 다친 어깨와는 무관하게.
리온은 그걸 봤다.
코벤의 어깨. 아까까지 감싸 쥐고 있던 어깨. 통로 안으로 뛰어들 때 양팔을 자유롭게 써서 몸을 던졌다. 왼손으로 벽을 짚고, 오른손으로 서류 가방을 감싸며. 양팔 모두. 어깨가 제한되는 동작이 하나도 없었다.
움직일 수 없을 정도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이 개——"
리온이 돌아서서 방을 봤다. 석상은 엘시가 있는 통로 입구에 서 있었다. 두 번째 내리침. 통로 천장이 더 갈라졌다. 돌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먼지가 엘시를 삼켰다.
엘시가 기어서 안쪽으로 물러나고 있었다. 오른쪽 다리에서 피가 흘렀다. 바닥의 먼지 위에 붉은 자국이 끌렸다.
석상이 세 번째로 팔을 올렸다.
통로가 무너진다.
리온은 달렸다.
방을 가로질러. 석상의 옆을 지나. 먼지 사이를 뚫고. 석상이 리온을 인식했다. 머리가 돌아갔다. 돌이 갈리는 소리. 팔의 방향이 바뀌었다. 엘시에서 리온으로.
"이쪽이다 돌대가리——!"
리온이 석상의 다리 사이를 지나쳤다. 돌 다리의 틈. 어깨를 좁히고 미끄러지듯 빠져나갔다. 석상의 주먹이 바닥을 때렸다. 리온이 있던 자리. 바닥이 갈라졌다. 파편이 리온의 등에 튀었다. 따가웠다. 외투에 구멍이 났을 것이다.
리온은 엘시가 있는 통로로 뛰어들었다. 엘시를 잡아 일으켰다. 로브 뒷깃을 잡아 위로 당겼다. 엘시의 몸이 가벼웠다.
"일어나. 걸어."
"다리가——"
"끌어줄게. 가자."
리온이 엘시의 팔을 어깨에 걸치고 통로 안쪽으로 걸었다. 엘시의 체중이 왼쪽으로 쏠렸다. 오른발을 딛지 못했다. 석상이 통로 입구에 섰다. 팔을 뻗었다. 닿지 않았다. 통로 폭이 좁아서. 돌 손가락이 통로 안쪽으로 뻗었지만, 어깨가 입구에 걸렸다. 석상의 몸이 통로보다 컸다.
10미터쯤 들어가자 석상이 팔을 거둬들였다. 돌이 돌에 부딪히는 소리가 멀어졌다.
리온은 엘시를 벽에 기대앉혔다. 다리를 봤다. 오른쪽 종아리에 돌 파편이 박혀 있었다. 주먹 반만 한 돌. 피가 흘렀지만 뼈까지는 아닌 것 같았다. 종아리 근육이 부풀고 있었다.
"아파요."
"알아. 참아."
리온이 외투를 찢어 다리를 감쌌다. 천으로 돌 파편 주변을 눌렀다. 엘시가 이를 악물며 신음을 삼켰다. 리온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응급처치. 전장에서 배운 게 아니라 카엘 곁에서 본 것이다. 세라가 하던 것을 카엘이 기억했고, 카엘이 하는 것을 리온이 봐두었다.
엘시가 눈물을 흘렸다. 소리 없이. 눈물이 주근깨 위를 타고 내렸다. 먼지와 섞여 연한 흙빛 줄기가 됐다.
"리온 씨."
"응."
"코벤 씨가…… 먼저 들어갔어요. 교수님보다."
"봤어."
"어깨를 다쳤다면서요. 근데 뛸 때 양팔을 다 썼어요."
리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천을 묶는 손에 힘을 줬다. 매듭이 단단해졌다.
"저를 미끼로 쓴 거예요?"
리온은 엘시를 봤다. 주근깨 위로 눈물 자국이 나 있었다. 눈은 흐리지 않았다. 스물두셋의 아이가 아니었다.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는 눈이었다. 이해하고, 그 이해가 아프다는 것을 아는 눈.
"……그래."
리온이 말했다.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엘시는 고개를 돌려 통로 천장을 올려다봤다. 어둠뿐인 천장. 볼 게 없었지만 올려다봤다.
"알고 있었어요. 코벤 씨가 저를 골랐다는 거. 직접 말하지 않았을 뿐이지."
"왜 나선 거야. 알면서."
엘시가 웃었다. 비뚤어진 웃음이었다. 입꼬리가 한쪽만 올라간 웃음.
"교수님이 뛰면 진짜 죽어요. 그건 사실이에요. 코벤 씨가 이용한 건 사실이지만, 교수님을 두고 갈 순 없으니까."
리온은 입을 다물었다.
이 아이가 코벤보다 나은 건, 계산을 하면서도 남을 위해 자기를 넣는다는 것이었다. 코벤은 남을 넣는다.
같은 계산. 다른 인간.
---
카엘은 나선형 계단을 내려갔다.
빛이 계단을 따라 번졌다. 발을 딛을 때마다 한 칸씩. 20계단. 30계단. 공기가 더 무거워졌다. 습도가 올라갔다. 혀끝에 금속 같은 맛이 돌아왔다. 유적 깊은 곳의 맛이었다.
계단이 끝났다.
좁은 통로. 폭 2미터. 천장이 낮아 고개를 약간 숙여야 했다. 벽에 문양이 있었지만, 결정의 절반 이상이 깨져 있었다. 오래전에 부서진 결정이 바닥에 가루처럼 쌓여 있었다. 발밑에서 바스락거렸다. 유리를 밟는 소리.
50미터쯤 걸었을 때 돌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가까웠다. 20미터 이내. 무거운 것이 바닥을 때리는 소리였다.
카엘은 검을 쥔 손에 힘을 줬다. 전투 자세. 자동으로 몸이 만들어지는 자세. 무릎을 낮추고, 무게 중심을 앞에 두고, 검을 비스듬히 올리고. 3년 전의 몸이 돌아왔다. 근육이 기억하는 형태. 생각보다 빨리. 머리가 아니라 몸이 먼저 움직였다.
통로 끝에 방이 있었다.
카엘이 발을 내딛자 방의 문양이 점등됐다. 붉은빛. 청백색이 아니었다. 통로의 빛과 다른 색. 방 전체가 붉게 물들었다.
석상이 있었다.
2미터. 사람 형태. 가슴에 붉은 결정. 한쪽 통로 입구 앞에 서서 팔을 뻗고 있다가 카엘의 등장에 반응했다. 머리가 돌아갔다. 이목구비 없는 얼굴이 카엘을 향했다. 가슴의 결정이 밝아졌다.
카엘과 석상의 거리. 5미터.
석상이 카엘을 향해 걸었다. 한 걸음. 바닥이 울렸다.
카엘은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달려들었다.
석상의 오른팔이 올라갔다. 내려왔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먼저 왔다. 카엘은 왼쪽으로 몸을 틀었다. 돌 주먹이 바닥을 때렸다. 파편이 튀었다. 돌조각이 뺨을 스쳤다. 따가웠다.
카엘은 석상의 팔이 바닥에 닿는 순간에 뛰었다. 팔 위로. 석상의 어깨 높이까지 올라갔다. 오른손의 검을 어깨 관절에 찔러 넣었다. 돌과 돌 사이의 틈. 관절의 이음새. 검 끝이 틈에 박혔다.
비틀었다.
돌이 갈라지는 소리. 석상의 오른팔이 어깨에서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지며 방이 울렸다. 무거운 충격파가 발바닥을 통해 올라왔다.
카엘은 착지하며 굴렀다. 어깨로 바닥을 찍고 한 바퀴 돌아 일어섰다. 석상의 왼팔이 옆으로 휘둘렸다. 머리 위 10센티미터를 지나갔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은색 머리카락이 돌 주먹의 바람에 날렸다.
일어서며 석상의 측면으로 돌아갔다. 잃어버린 팔 쪽. 사각.
검을 무릎 관절에 찔렀다. 같은 방식. 틈. 비틀기. 손목이 울렸다. 돌의 저항이 검을 통해 팔 전체에 전달됐다.
석상의 다리가 꺾였다. 돌덩이가 옆으로 쓰러졌다. 바닥이 울렸다. 먼지가 피어올랐다.
석상은 한 팔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남은 왼팔이 바닥을 밀었다. 돌 손가락이 바닥에 박혔다. 카엘이 가슴의 붉은 결정 앞에 섰다.
검끝을 결정에 대었다.
찔렀다.
결정이 깨졌다. 붉은빛이 꺼졌다. 방 안의 붉은 빛이 사라졌다. 카엘의 발밑에서 나오는 청백색만 남았다. 석상이 멈췄다. 들고 있던 팔이 바닥에 떨어졌다.
카엘은 검을 빼고 숨을 몰아쉬었다. 10초. 전부 10초였다. 21명을 벤 남자에게 관절이 있는 돌덩이는 적이 아니었다. 느리고, 예측 가능하고, 검을 피하지 않으니까. 사람이 더 어렵다. 사람은 겁에 질린 눈으로 검을 막고, 도망치고, 살려달라고 빈다. 돌은 그런 짓을 안 한다.
왼손의 은빛이 맥박쳤다. 평온하게. 전투와 무관하게. 카엘이 싸우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이.
쓸모없는 빛.
카엘은 외투 안쪽으로 검을 닦았다. 검날에 돌가루가 묻어 있었다. 방을 둘러봤다. 통로가 세 개 있었다. 카엘이 들어온 쪽. 석상이 지키고 있던 쪽. 반대편.
석상이 지키던 통로 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 하나가 아니다. 둘. 하나는 일정하고, 하나는 질질 끌리는 소리. 누군가를 부축하고 있다.
카엘은 검을 들었다. 손잡이를 거꾸로 쥐었다. 사람이든 아니든 대응할 수 있는 그립.
어둠 속에서 녹색빛이 나타났다.
엘시의 유리병이었다. 리온이 엘시를 부축하고 있었다. 엘시의 오른쪽 다리에 피 묻은 천이 감겨 있었다. 천이 붉게 젖어 있었다.
리온이 카엘을 봤다.
카엘이 리온을 봤다.
1초.
"……살아 있었어."
리온이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금색 눈이 젖어 있었다. 다음 순간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갔다. 입꼬리가 올라갔다. 힘없는 미소. 리온이 감정을 덮을 때 쓰는 미소.
"그래."
카엘이 말했다. 검을 내렸다.
"석상은?"
"죽였어."
리온이 바닥에 쓰러진 석상을 봤다. 팔이 떨어져 있고, 다리가 꺾여 있고, 가슴의 결정이 깨져 있었다. 10초 만에.
"……어떻게?"
"관절이 있어. 돌이든 뭐든 관절이 있으면 부술 수 있어."
리온이 피식 웃었다. 이번 웃음에는 힘이 있었다.
"전쟁의 신답네."
"그 별명 부르지 마."
카엘은 엘시를 봤다. 다리에서 피가 났다. 얼굴이 창백했다. 녹색빛 아래에서 입술이 보라색에 가까워 보였다. 체온이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뭐가 있었어."
질문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카엘의 눈이 엘시의 다리, 리온의 뺨에 있는 긁힌 자국, 그리고 두 사람 뒤에 아무도 없는 통로를 차례로 읽었다.
"석상이요. 같은 거. 통로 입구를 막고 있었어요."
"그래서 다친 거야?"
엘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엘은 리온을 봤다. 리온의 뺨에 긁힌 자국이 있었다. 돌 파편에 맞은 것이다.
"코벤은?"
리온의 표정이 변했다. 미소가 사라졌다. 금색 눈이 어두워졌다.
"반대편 통로로 갔어. 볼턴 교수랑."
"왜 따로?"
리온이 잠깐 침묵했다. 엘시를 봤다. 엘시가 고개를 돌렸다. 녹색빛이 출렁거렸다.
"……나중에 얘기할게."
카엘은 더 묻지 않았다. 리온의 목소리에 감정이 섞여 있었다. 평소와 다른 종류의. 분노. 리온이 장난기를 전부 벗어던진 목소리. 카엘은 그걸 알아차렸다. 5년을 같이 다닌 사람이니까. 리온이 이 톤을 쓸 때는 심각한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다.
지금 물을 타이밍은 아니었다. 한 번 거부하면 더 파고들지 않는다. 둘 사이의 규칙.
"움직일 수 있어?"
엘시에게 물었다.
"부축하면요."
"그래."
카엘은 엘시의 반대편 팔을 잡았다. 리온과 카엘 사이에 엘시가 있는 형태. 엘시의 몸이 가벼웠다. 뼈와 로브만 있는 것 같았다.
세 사람이 걸었다. 석상이 지키고 있던 것의 반대편 통로로.
카엘의 발밑에서 빛이 퍼지며 통로를 밝혔다. 약했지만 있었다. 벽면의 문양이 카엘의 빛에 반응하며 3미터 앞까지 비추고 있었다.
"빛이다."
엘시가 말했다. 녹색빛이 아닌, 청백색 빛. 카엘에게 반응하는 유적의 빛. 엘시의 눈에 안도가 스쳤다. 이 어둠 속에서 녹색빛만으로 걸어온 아이에게, 통로를 비추는 빛은 달랐다.
리온이 카엘을 봤다.
"나중에 들을 게 많겠네."
"나도."
두 사람은 더 말하지 않았다.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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