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보자, 하늘.
크로노리프트 6화 인간이라는 괴물 #01 본문
코벤은 생각보다 상태가 좋았다.
외투가 한쪽 어깨에서 찢어져 있었고, 안경테가 휘어 있었다. 오른쪽 렌즈에 금이 가 있어서 빛이 굴절되면 두 줄로 갈라져 보일 것이다. 걸을 수 있었고, 서류 가방을 놓지 않았다. 벽에 빨려 들어가고, 어둠에 던져지고, 방향을 알 수 없는 통로를 혼자 걸어왔을 텐데. 저 상황에서도 가방을 챙겼다. 가죽 끈이 손가락에 파고든 자국이 있었다. 한 번도 놓지 않았다는 뜻이다. 리온의 눈에 걸렸다.
"다치신 데는?"
"괜찮습니다. 어깨를 부딪혔을 뿐이에요."
어둠 속에서 서로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리온의 횃불은 진작에 꺼져 있었고, 코벤도 불이 없었다. 통로 안의 공기는 차갑고 건조했다. 오래된 돌과 먼지의 냄새가 목 안쪽에 걸렸다. 침을 삼키면 모래를 삼키는 것 같았다.
리온이 귀를 세웠다. 두 사람의 호흡 소리가 벽에 부딪혀 짧게 돌아왔다. 그 너머로, 공기의 흐름. 앞쪽에서 미세한 바람이 불어왔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바람이 아니라, 통로의 공기보다 미세하게 습한 바람이었다. 넓은 공간의 공기.
"앞에 공간이 있어. 바람이 흐르니까."
"반엘프의 감각이군요. 유용합니다."
코벤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 정중하고, 부드럽고. 방금 벽에 빨려 들어가 어둠에 던져진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심장이 빨리 뛰는 기색도 없었고, 숨이 가쁜 것도 아니었다. 리온의 귀에는 코벤의 심박이 잡혔다. 일정했다. 이 어둠 속에서 심박이 일정한 사람은 두 종류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거나, 느끼는 것을 완벽하게 눌러두는 사람이거나.
"걷겠습니다. 리온 씨가 앞서주시죠."
리온이 앞에 서서 벽을 짚으며 걸었다. 돌 표면이 거칠었다. 손바닥에 문양의 홈이 스쳐 지나갔다. 홈의 깊이가 통로 입구 쪽보다 얕았다. 오래된 구간이다. 코벤이 뒤를 따랐다. 발소리 두 개가 어둠 속에서 울렸다. 코벤의 발소리는 정확했다. 더듬거리는 리듬이 아니라 리온의 보폭에 맞춰 일정한 간격으로 찍히는 발소리. 이 어둠 속에서 리온의 발소리를 듣고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귀가 좋은 게 아니라 머리가 좋은 것이다.
10분쯤 걸었을 때 리온이 멈췄다.
"빛."
전방 50미터쯤. 녹색빛이 어둠 속에서 약하게 흔들렸다. 작은 별 같은 빛. 흔들리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가 들고 걷고 있다.
리온은 알았다. 마나 없이도 빛을 내는 것. 엘시의 발광 이끼.
"엘시!"
리온이 외쳤다. 메아리가 통로를 울렸다. 돌벽에 부딪혀 세 번 돌아온 뒤에 죽었다.
녹색빛이 멈췄다. 1초 뒤에 대답이 왔다.
"리온 씨?!"
달려왔다. 엘시가 유리병을 든 채 달려왔다. 녹색빛이 흔들리며 가까워졌다. 뒤에 볼턴이 벽을 짚고 느리게 따라왔다. 볼턴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들이쉬는 숨보다 내쉬는 숨이 길었다. 체력이 한참 전에 바닥난 사람의 호흡이었다.
"살아 있었어요!"
엘시의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울었던 흔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울지 않았다. 주근깨 위로 먼지가 두껍게 묻어 있었고, 로브 소매가 한쪽이 찢어져 있었다. 유리병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있었다. 손가락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오래 꽉 쥐고 있었다는 뜻이다.
"너도 살아 있고. 볼턴 교수도?"
"살아 있어."
볼턴이 벽에 기대며 말했다. 숨이 거칠었다. 회색 수염이 가슴 위에서 오르내렸다. 얼굴이 녹색빛 아래에서 창백하게 보였다. 눈 아래 주름이 더 깊어져 있었다. 늙은 얼굴이 더 늙어 보였다.
"교수님은 체력이 한계예요. 더 걷기 힘들어하세요."
엘시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볼턴이 듣지 못하게 하려는 톤이었지만, 볼턴도 들었다. 얼굴을 찡그렸지만 부정하지 않았다.
코벤이 앞으로 나왔다. 녹색빛 안으로 들어서자 찢어진 외투와 휘어진 안경이 드러났다.
"코벤 씨도 있었어요?"
"네. 리온 씨와 합류했습니다."
코벤이 볼턴을 봤다. 볼턴의 상태를 2초간 훑었다. 축 처진 어깨, 거친 호흡, 벽 없이는 서 있지 못하는 다리. 무릎이 안쪽으로 꺾여 있었다. 체중을 벽에 맡기고 있었다.
"교수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은 거 같아 보여?"
볼턴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평소의 짜증은 에너지가 있었다. 지금은 그것조차 없었다.
코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표정 없이.
"넬이랑 하르만 박사는?"
리온이 물었다.
"못 봤어요. 우리는 둘이서만 걸어왔어요."
엘시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바닥에서 뼈를 봤어요. 10년 전 탐사대원 거."
엘시의 목소리가 떨렸다. 유리병을 쥔 손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녹색빛이 벽면에서 출렁거렸다.
"합류한 것만으로도 다행입니다. 넷이면 혼자보다 낫죠."
코벤이 말했다. 목소리에 위로의 감정은 없었다. 사실을 말했을 뿐이었다.
"앞으로 어떡하죠?"
엘시가 물었다.
리온이 귀를 세웠다. 바람의 방향. 앞쪽에서 흘러오는 공기가 여전히 느껴졌다. 습도가 미세하게 높아졌다. 넓은 공간이 가까워지고 있다.
"이 통로 앞에 넓은 공간이 있어. 공기가 거기서 흘러오고 있어. 다른 통로랑 연결됐을지도 모르고."
"가봐야겠네요."
코벤이 말했다.
볼턴이 벽에서 등을 떼려다 비틀거렸다. 무릎이 접히려 했다. 엘시가 팔을 잡았다. 볼턴의 팔뚝이 마른 나뭇가지처럼 가늘었다. 로브 아래에서 뼈의 윤곽이 만져졌다.
"교수님."
"가. 걸을 수 있어."
걸을 수 있다고 했지만 걸음이 느렸다. 20미터에 3분. 한 걸음마다 오른발이 바닥을 질질 끌었다. 무릎이 제대로 펴지지 않는 것이다. 리온은 볼턴의 속도에 맞춰 걸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늙은 남자의 자존심이 남아 있을 거리를 유지했다.
통로가 끝났다.
넓은 방이 나타났다.
---

둥근 방이었다. 지름 10미터쯤. 천장은 평평했다. 높이는 4미터 정도. 사람이 만든 공간이었다. 벽면에 문양이 있었지만 본 통로의 것과 달랐다. 날카로운 직선. 삼각형의 반복. 곡선이 없었다. 유적의 다른 구간에서 보았던 부드러운 문양과 대비되는, 공격적인 패턴이었다. 문양 사이사이에 작은 결정이 박혀 있었지만 전부 죽어 있었다. 카엘이 없으니까.
엘시가 유리병을 들어 방을 비췄다. 녹색빛이 방 안을 어렴풋이 드러냈다. 바닥은 편평한 석판이었다. 먼지가 고르게 쌓여 있었다. 아무도 들어온 적 없는 방이었다. 공기가 통로보다 차가웠다. 돌이 품고 있는 냉기가 피부에 닿았다.
중앙에 그것이 있었다.
석상이었다.
사람 형태. 높이 2미터. 무릎을 꿇은 자세. 양손을 바닥에 짚고 있었다. 머리가 숙여져 있었다. 돌로 만들어진 사람. 돌 표면이 매끄러웠다. 도구로 깎은 것이 아니라 물이 돌을 깎은 것처럼 자연스러운 곡면이었다. 손가락이 있었다. 관절이 있었다. 어깨와 팔꿈치가 분리되어 있었다. 관절 사이에 미세한 틈이 있었다. 움직이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석상의 가슴에 결정이 박혀 있었다. 붉은색. 탁하게 빛났다. 유적의 다른 결정들처럼 청백색이 아니라 붉은색. 맥박 없이, 그냥 빛났다. 불씨가 꺼지기 직전에 남아 있는 마지막 빛 같았다.
"뭐야 저거."
리온이 속삭였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코벤이 석상을 2초간 바라봤다. 시선이 석상의 관절을 훑었다. 어깨, 팔꿈치, 무릎. 가슴의 결정. 그 시선이 분석하는 시선이라는 걸 리온은 알아챘다. 공포가 아니라 평가.
코벤이 방 반대편을 봤다. 통로 입구가 있었다. 어두운 구멍. 녹색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 검은 입이 벌어져 있었다.
"반대편에 통로가 있습니다. 저쪽으로 가야 해요."
"석상을 지나가야 한다는 거잖아."
리온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네 사람은 통로 입구에 서서 석상을 바라봤다. 석상은 움직이지 않았다.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숙인 채. 기도하는 자세처럼 보이기도 했고, 벌을 받는 자세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냥 조각상 아니에요?"
엘시가 물었다. 바라는 목소리였다.
"가슴에 박힌 결정이 빛나고 있어."
리온이 말했다.
"이 유적에서 가만히 있는 건 없었어. 석문도, 바닥도, 벽도. 전부 갑자기 움직였지."
침묵이 흘렀다. 녹색빛이 출렁거렸다. 엘시의 손이 떨렸다. 석상의 그림자가 바닥에서 흔들렸다. 머리를 숙인 형태의 그림자가 네 사람을 향해 뻗어 있었다.
볼턴이 벽에 기대앉았다. 주저앉는 것에 가까웠다. 무릎이 꺾이며 등이 벽에 미끄러졌다. 바닥에 닿자 숨을 길게 내쉬었다.
"……나는 못 뛰어. 솔직히 말할게. 저걸 지나가려면 뛰어야 할 텐데, 못 해."
볼턴의 목소리가 낮았다. 자존심을 내려놓는 데 힘이 드는 목소리였다. 이를 악물고 있었다. 입꼬리가 아래로 당겨져 있었다. 60년을 마법사로 살았던 남자가, 뛸 수 없다고 말했다.
코벤이 볼턴을 봤다. 그리고 리온을. 그리고 엘시를. 세 사람을 차례로 훑는 시선의 속도가 일정했다. 감정이 실리지 않은 시선.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코벤의 목소리는 변함없이 부드러웠다.
"만약 저것이 반응하는 대상이라면, 한쪽에서 관심을 끌면 다른 쪽이 지나갈 수 있습니다."
"미끼."
리온이 말했다. 한 단어에 코벤의 다섯 문장을 요약했다.
"네."
"누가?"
"리온 씨가 적격입니다. 반엘프의 반사신경이라면——"
"안 돼."
리온이 잘랐다. 목소리에 미소가 없었다. 평소의 장난기가 빠진 리온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모든 위험을 내가 떠안을 이유는 없어. 코벤 씨, 당신이 해."
코벤이 미세하게 미소 지었다. 입꼬리만 올라간 미소. 눈은 웃지 않았다.
"저는 어깨를 다쳤습니다. 피하는 동작이 제한됩니다."
"아까 괜찮다고 했잖아."
"걷는 건 괜찮지만 구르거나 뛰는 건 다른 문제입니다."
리온은 코벤을 봤다. 코벤의 눈이 안경 너머에서 차분하게 빛났다. 금 간 렌즈 너머의 눈. 거짓말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었다. 어깨를 다친 건 사실이지만,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인지는. 코벤은 다친 어깨 쪽 팔을 자연스럽게 몸에 붙이고 있었다. 통로를 걸어올 때 양팔의 균형이 무너져 있지는 않았다. 리온의 귀는 코벤의 발소리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다는 걸 기억했다.
"교수님은 체력이 안 되시고."
코벤이 볼턴 쪽을 흘끗 보며 말했다. 자연스러운 시선 이동이었다. 볼턴이라는 선택지를 지우는 시선.
"저도 어깨가 이렇고. 리온 씨는 가장 빠른 분이시지만, 유일한 정찰 능력이시니 위험에 노출시키기 아깝습니다."
코벤이 고개를 살짝 돌려 엘시를 봤다.
보지 않는 것처럼 보면서 봤다. 0.3초. 시선이 머문 시간. 리온의 눈이 그 0.3초를 잡아냈다. 눈 깜빡임도 잡아내는 시력이 잡아낸 0.3초.
"코벤 씨."
리온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경고의 톤. 혀 뒤쪽에서 밀어내는 목소리. 정보상이 상대에게 "거기까지"라고 말할 때 쓰는 톤.
"아뇨, 저는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코벤은 정말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엘시를 지목하지 않았다. 소거법을 말했다. 볼턴은 안 되고, 코벤은 안 되고, 리온은 아까우면. 남는 사람은 한 명이다. 코벤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논리의 조각을 하나씩 내려놓았고, 마지막 조각의 자리를 비워뒀다. 직접 놓지 않아도 누구나 볼 수 있는 빈자리.
엘시는 똑똑한 아이였다. 셈을 할 줄 알았다.
"제가 할게요."
엘시가 말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떨리지 않으려 힘을 주고 있었다. 턱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리온이 돌아봤다.
"엘시."
"저는 젊고, 다치지 않았고, 이 중에서 전투 능력이 가장 없어요. 반대편으로 지나가는 건 리온 씨가 교수님을 부축해서 가는 게 맞아요. 저보다 리온 씨가 빠르니까."
논리적이었다. 완벽하게.
코벤이 심어놓은 논리였다.
리온은 코벤을 봤다. 코벤은 석상을 보고 있었다. 리온의 시선을 피한 게 아니라, 이미 결론이 났다는 듯이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서류 가방의 끈을 만지작거리는 손이 편안했다. 결과를 기다리는 손이 아니라 결과를 안 손이었다.
"엘시. 위험해."
"알아요. 근데 교수님이 뛰지 못하는 건 사실이잖아요. 코벤 씨 어깨도 다쳤고. 리온 씨가 교수님을 두고 갈 수는 없잖아요."
리온은 이를 악물었다. 송곳니가 아래 잇몸에 눌렸다. 맛. 피 맛은 아니었다. 분노의 맛이었다.
엘시의 말이 맞았다. 볼턴은 혼자 못 뛴다. 리온이 볼턴을 부축해 반대편으로 데려가야 한다. 코벤은 다쳤다고 주장한다. 남는 건 엘시다.
코벤이 만든 퍼즐이었다. 조각 하나하나는 사실이었다. 배열은 코벤이 했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다. 엘시가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그게 더 잔인했다. 칼로 베는 것보다. 강요당하면 원망할 수 있다. 스스로 결정하면 원망할 곳이 없다. 코벤은 그걸 아는 사람이었다. 발렌의 부하답게.
"……한 가지 조건."
리온이 말했다.
"방 안에 들어가지 마. 입구에서 소리만 질러. 석상이 반응하면 바로 통로 안으로 물러나. 알겠지?"
"네."
엘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근깨 위로 먼지가 묻어 있었다. 눈이 떨렸다. 눈동자 안에서 녹색빛이 흔들렸다. 울지 않았다. 입술을 꽉 다물고 있었다. 아랫입술에 이가 파고든 자국이 하얗게 남아 있었다.
볼턴이 입을 열었다.
"엘시."
"괜찮아요, 교수님."
"괜찮지 않아. 내가——"
"교수님이 뛰면 넘어져요. 넘어지면 둘 다 죽어요."
볼턴이 입을 다물었다. 주먹이 떨렸다. 무릎 위에 올려놓은 주먹. 마법이 있었다면 석상 따위 불꽃 하나로 녹일 수 있었을 것이다. 마법이 없는 주먹은 떠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간다."
리온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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