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보자, 하늘.
크로노리프트 5화 기억의 바닥 #01 본문
하얀 세계.
아무것도 없었다. 바닥도, 천장도, 벽도. 시야 전체가 백색이었다. 흰색이 아니라 백색. 색이 빠진 게 아니라 색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었다. 빛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그림자가 생기지 않았다. 발밑에도, 뒤에도. 그림자 없이 서 있다는 건 빛이 모든 방향에서 오거나, 아예 없거나 둘 중 하나였다.
카엘은 서 있었다. 서 있다는 감각만 있었다. 발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부츠 밑창에 딱딱한 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체중이 실리는 감각은 있었다. 무릎이 구부러지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발 아래에 바닥이 있는지 없는지 눈으로는 확인되지 않았다.
숨을 쉬었다. 공기는 있었다. 온도가 없는 공기.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혀끝에 맛이 없었다. 유적 안에서 느꼈던 금속 같은 전기적 느낌도 사라져 있었다. 콧속이 건조하지도, 습하지도 않았다. 아무것도 아닌 공기. 심장은 뛰었다. 갈비뼈 안쪽에서 둔탁하게, 확실하게. 살아 있다.
"……어디야."
목소리가 울리지 않았다. 입에서 나온 소리가 공기 중에서 즉시 흡수됐다. 메아리도 잔향도 없는 공간. 자기 목소리인데 남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입술이 움직인 건 느꼈지만, 소리가 돌아오지 않으니 말을 한 건지 안 한 건지 의심이 들었다.
왼손을 봤다. 은빛이 없었다. 평범한 손이었다. 결정에 닿기 전까지 타오르던 빛이 전부 사라져 있었다. 손등의 혈관이 보였다. 보통 사람의 혈관. 푸른색이 피부 아래에서 희미하게 비쳤다. 은백색 실선이 덮여 있던 손등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주먹을 쥐었다 펴봤다. 굳은살이 잡힌 손바닥. 칼자루를 수천 번 쥐어 마모된 손금. 자기 손이 맞았다.
오른손을 더듬어봤다. 검이 없었다. 허리춤도 비어 있었다. 외투의 감촉은 있었다. 옷깃이 목에 닿는 느낌. 부츠 안에서 발가락이 움직이는 감각. 몸은 있었다. 몸만 있었다.
걸었다. 한 발. 두 발. 방향 감각이 없었다. 어디를 향해 걷는 건지 몰랐다. 앞이 뒤와 같았고, 왼쪽이 오른쪽과 같았다. 걷는 건지 제자리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발을 옮기는 감각은 있었지만 풍경이 변하지 않았다. 백색이 백색으로 이어졌다. 끝없이.
다섯 걸음째에 돌아봤다. 뒤에도 아무것도 없었다. 발자국도 남지 않았다.
열 걸음째.
세계가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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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였다.
전환은 순간이었다. 백색이 갈라지듯 벗겨지고, 그 아래에서 색이 쏟아져 나왔다. 한 발을 내딛었을 때 백색이었고, 발이 닿았을 때 돌바닥이었다. 냄새가 먼저 왔다. 먼지와 석재. 그리고 풀냄새. 건조한 풀이 아니라 살아 있는 풀. 어딘가에서 바람이 불었다. 따뜻했다. 살결을 스치는 바람에 온도가 있었다. 백색 세계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것.
카엘은 거리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첨탑과 아치. 곡선이 지배하는 건축물. 벽화에서 봤던 그 도시. 벽화의 납작한 색채가 아니었다. 살아 있었다. 첨탑의 돌 표면에 이끼가 끼어 있었고, 아치의 그림자가 바닥에 길게 늘어져 있었다. 해가 있었다. 고개를 들자 하늘이 보였다. 구름이 느리게 흘렀다. 파란 하늘이 너무 선명해서 눈이 시렸다.
사람들이 지나갔다. 카엘의 옆을. 카엘을 보지 않고. 여자가 바구니를 끼고 걸었다. 바구니 안에 과일이 담겨 있었다. 이름 모를 과일. 붉은색과 주황색 사이의 색이었다. 남자 둘이 나란히 걸으며 이야기를 했다. 입이 움직이는 건 보였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이가 달려갔다. 맨발이었다. 돌바닥 위를 맨발로 뛰는 아이의 발바닥이 보였다. 작은 발. 때가 묻은 발가락.
손을 뻗어 지나가는 남자의 어깨를 잡으려 했다.
손이 통과했다.
저항감이 전혀 없었다. 물속에 손을 넣는 것보다도 가벼웠다. 공기를 잡는 것과 같았다. 카엘의 손가락이 남자의 어깨를 관통하고 반대편으로 나왔다. 남자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느끼지 못한 것이다.
그림자처럼. 카엘이 이 세계의 유령이거나, 이 세계가 카엘의 환각이거나.
발밑을 봤다. 카엘의 그림자가 있었다. 해가 비추고 있었으므로 그림자는 생겼다. 돌바닥 위에 늘어진 그림자. 그림자 위를 사람들이 밟고 지나갔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카엘의 그림자는 이 세계에 존재했지만, 카엘은 존재하지 않았다.
바람이 뺨을 스쳤다.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바람은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은 만질 수 없었다.
하늘이 갈라졌다.
전조 없이. 소리 없이. 하늘 한가운데에 금이 갔다. 파란색 사이에 검은 선이 그어지듯. 그 선이 넓어졌다. 금이 아니라 틈이었다. 하늘의 틈. 거기서 빛이 쏟아졌다. 청백색. 카엘의 왼손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색의 빛이 하늘의 갈라진 틈에서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빛의 기둥이 도시 위로 내리꽂혔다. 하나가 아니었다. 둘, 셋, 다섯. 틈이 벌어질수록 기둥이 늘어났다.
대지가 벌어졌다. 카엘의 발밑에서부터. 돌바닥에 금이 갔다. 갈라진 틈이 벌어지며 먼지가 솟아올랐다. 건물이 무너졌다. 첨탑이 중간에서 꺾였다. 위쪽 절반이 옆으로 미끄러지며 떨어졌다. 아치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돌덩이가 거리 위로 쏟아졌다.
사람들이 달렸다. 비명이 들리지 않았다. 소리가 없는 세계였다. 입만 벌어진 채 달리는 사람들의 얼굴만 보였다. 공포. 아이를 안고 달리는 여자의 얼굴. 넘어진 노인을 두고 가는 남자의 등. 갈라진 땅에 발이 빠진 소년의 손이 허공을 잡았다. 아무도 그 손을 잡지 않았다.
카엘은 소년에게 손을 뻗었다. 반사적으로.
손이 통과했다.
빛이 대지의 균열 사이로 스며들었다. 땅속으로. 돌 사이로. 빛이 닿는 곳마다 결정이 돋아났다. 청백색 결정. 균열의 가장자리를 따라 수정처럼 자라났다. 돌바닥을 뚫고, 무너진 벽을 관통하고, 먼지 사이에서 솟아올랐다. 결정이 자라는 데에는 소리가 있었다. 이 침묵의 세계에서 유일한 소리. 바스락. 갈라지는 소리. 돌이 밀려나는 소리. 결정은 살아 있는 것처럼 자랐다.
대균열.
이것이 대균열이었다.
카엘은 서서 봤다. 도시가 갈라지는 것을. 세계가 찢어지는 것을. 도시는 반으로 나뉘었다. 왼쪽 절반이 오른쪽보다 30센티미터쯤 아래로 내려앉았다. 수평이던 거리가 계단이 됐다. 건물의 벽이 대각선으로 갈라졌다. 창문 하나가 반으로 쪼개져 한쪽은 남아 있고 한쪽은 떨어져 있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빛이 카엘의 몸을 통과했다. 아무 감각도 없었다. 빛이 가슴을 관통하고 등 뒤로 빠져나갔다. 종이를 통과하는 빛처럼. 왼손이 반응했다. 은빛이 맥박쳤다. 백색 세계에서 사라졌던 은빛이 다시 나타나 있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빛과 같은 리듬으로 점멸했다. 이 빛과 같은 것이 자기 몸속에 있다는 걸 알았다.
왜?
어떻게?
대답 없이 세계가 하얗게 변했다. 도시가 지워지듯 사라졌다. 무너지는 첨탑이, 달리는 사람들이, 갈라진 하늘이 백색에 먹혔다. 마지막까지 남은 것은 균열 사이에서 자라는 결정의 청백색 빛이었다. 그것마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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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세계로 돌아왔다.
카엘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숨이 가빴다.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관자놀이에서 턱 아래까지 땀줄기가 흘러내렸다. 입안이 텁텁했다. 혀가 마른 모래를 핥은 것처럼 거칠었다.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렸다. 평소의 두 배쯤 되는 속도로. 위장이 뒤집히는 느낌이 있었다. 토할 것 같았다. 참았다. 무릎 위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인 채 숨을 내쉬었다.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심장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환각인가. 과거인가. 결정이 보여준 것인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도시가 진짜로 존재했던 건지, 카엘의 머리가 만들어낸 건지. 사람들이 진짜 달리고 있었는지, 카엘이 보고 싶은 것을 본 건지. 하지만 돌바닥의 감촉은 진짜 같았다. 바람의 온도도. 결정이 자라는 소리도.
한 가지만 분명했다. 하늘에서 쏟아진 것과 자기 몸속에 있는 것이 같은 종류라는 것. 세계를 찢어놓은 그것이 자기 혈관 속에 있다는 것. 천 년 전에 도시를 삼킨 것과 같은 색의 빛이 지금 카엘의 손등 아래에서 뛰고 있었다.
하얀 세계가 깨지기 시작했다. 균열이 생겼다. 백색 위에 검은 금이 갔다. 바닥이 아래로 빠졌다. 발밑이 없어졌다.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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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떴다.
돌바닥이었다. 차가웠다. 뺨에 닿는 감촉. 차갑고, 거칠고, 먼지가 묻어 있었다. 먼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오래된 돌과 건조한 공기. 유적의 냄새였다. 원형 홀의 바닥.
카엘은 엎드려 있었다. 온몸이 아팠다. 뼛속까지 결리는 통증. 마치 고열에 시달린 후처럼 몸이 무거웠다. 팔에 힘을 주자 팔꿈치가 갈라지는 것 같았다. 관절마다 녹이 슨 느낌이었다. 입술이 갈라져 있었다. 혀로 입술을 핥자 피 맛이 났다.
고개를 돌려 석대를 봤다. 석대 위의 결정이 변해 있었다. 맥박이 멈춰 있었다. 청백색 빛이 사라지고, 투명한 수정처럼 변해 있었다. 홀에 들어왔을 때 심장처럼 뛰던 빛이 사라져 있었다. 죽은 것인지, 비워진 것인지. 결정의 표면이 금이 가 있었다. 안에서 바깥으로 퍼진 듯한 갈라짐. 누군가 안쪽에서 벽을 때린 것처럼.
왼손을 봤다.
은빛이 이전보다 짙어져 있었다. 손등만이 아니었다. 손목, 팔뚝 중간까지 은백색 실선이 피부 아래에 새겨져 있었다. 닦아도 안 지워질 것 같은 선. 혈관을 따라 갈라지는 것이 아니라 문양처럼 퍼져 있었다. 유적 벽에 새겨진 문양과 비슷한 곡선. 카엘은 손목을 돌려봤다. 안쪽 피부에까지 실선이 닿아 있었다. 얇고, 정밀하고, 사람이 새긴 것이 아닌 선.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잡았다. 관자놀이에서 뒤통수까지. 은색이 절반 가까이 차지하고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 사이에 은색이 뒤섞인 것이 아니라, 은색 영역이 따로 있었다. 관자놀이에서 시작되어 귀 뒤를 지나 뒤통수까지. 결정을 만지기 전에는 서너 가닥이었다. 지금은 머리 절반이다.
"……."
일어서려 했다.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손바닥으로 바닥을 밀었다. 팔이 떨렸다. 그대로 다시 엎어졌다. 이마가 바닥에 부딪혔다. 둔한 통증이 울렸다. 두 번째 시도에서 간신히 일어섰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무릎이 안쪽으로 접히려 했다. 벽을 짚었다. 차가운 돌이 손바닥에 닿았다. 그 감각에 의지해서 서 있었다.
홀의 빛이 어두워져 있었다. 결정이 죽자 돔의 문양도 희미해졌다. 천장의 수백 개 결정들이 꺼져 있었다. 카엘이 들어왔을 때 일제히 깨어났던 것들이 전부 죽어 있었다. 카엘의 발밑에서 나오는 빛만 남아 있었다. 그것마저 희미했다. 이전처럼 통로 전체를 밝히는 빛이 아니라 발 반 걸음 앞만 비추는 빛.
얼마나 쓰러져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1분인지 1시간인지. 시간 감각이 없었다. 몸이 무거운 것으로 보면 오래 쓰러져 있었을 것이다.
리온.
이름이 떠올랐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 엘시. 볼턴. 넬. 하르만. 코벤. 여섯 명이 유적 어딘가에서 어둠 속을 걷고 있다. 카엘 때문에 갇힌 사람들.
찾아야 했다.
---
리온은 계속 걸었다.
횃불이 짧아지고 있었다. 기름에 젖은 천이 타들어가며 연기를 뿜었다. 연기가 낮은 천장에 부딪혀 통로 안에 퍼졌다. 목이 따가웠다. 기름이 떨어져 간다. 30분쯤 더 쓸 수 있을까. 그 후에는 어둠이다. 반엘프의 시력도 빛이 완전히 없으면 종이쪽지에 불과했다.
통로는 끝없이 이어졌다. 방향을 알 수 없었다. 올라가는 건지 내려가는 건지. 경사가 있는 것 같기도, 없는 것 같기도 했다. 벽의 문양은 죽어 있었고, 횃불로 비춰봐도 이끼와 먼지뿐이었다. 천장에서 물 한 방울이 어깨 위에 떨어졌다. 차가웠다. 물이 있다는 건 어딘가에 바깥과 통하는 곳이 있다는 뜻일 수도 있었고, 그냥 돌 사이의 수분일 수도 있었다.
리온은 걸으면서 벽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습관이었다. 생각할 때 손가락을 움직이는 버릇. 탁자 위에서는 리듬을 두드리고, 벽 앞에서는 벽을 두드렸다. 소리의 반향으로 통로의 폭을 가늠했다. 여기는 좁다. 2미터가 채 안 된다. 10미터 앞도 비슷한 것 같다. 넓어지는 기미가 없었다.
"혼자 걷기엔 좀 심심한데."
아무도 없는 통로에서 혼잣말을 했다. 목소리가 벽에 부딪혀 금방 돌아왔다. 짧은 메아리. 좁은 공간의 증거.
그때 벽의 문양이 깜빡였다.
아주 짧게. 0.5초. 청백색 빛이 벽을 타고 흘렀다가 사라졌다. 리온의 횃불 빛 아래에서, 분명히 다른 색의 빛이 벽면을 스쳤다.
리온이 멈췄다.
"……뭐야?"
횃불을 벽에 가까이 가져갔다. 문양의 홈이 보였다. 깊이가 일정한 조각. 그 홈 안에서 잔상처럼 빛이 남아 있다가 꺼졌다. 손으로 만져봤다. 차가운 돌. 아무 감각도 없었다. 카엘이 만지면 열리고, 빛나고, 반응했던 것들이 리온에게는 그냥 돌이었다.
다시 깜빡. 이번에는 1초. 빛이 벽면의 문양을 따라 흘러갔다. 통로 안쪽으로. 방향을 가리키는 것처럼. 맥박 같은 리듬이었다. 한 번 차올랐다가 가라앉으며 앞으로 번지는 움직임.
카엘이 뭔가 한 건가.
리온에게는 판단할 방법이 없었다. 이 유적에서 빛이 나는 건 카엘과 관련된 일이었다. 지금까지 그래왔다. 석문이 그랬고, 통로가 그랬고, 벽이 그랬다. 카엘이 살아 있다면 어딘가에서 빛을 내고 있을 것이다. 그 빛이 유적의 문양을 통해 흘러오는 것일 수 있었다.
아니면 유적이 새 함정을 펼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여기 서 있어봤자 횃불만 줄어."
빛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었다.
문양이 간헐적으로 깜빡였다. 10초에 한 번. 약하고, 불규칙하고, 곧 꺼질 것 같은 빛. 방향은 일관됐다. 앞으로. 리온은 깜빡임의 간격을 세기 시작했다. 정보상의 습관. 패턴이 있는지 없는지 파악하는 게 먼저다. 8초. 12초. 9초. 11초. 규칙적이지는 않았다. 살아 있는 무언가의 리듬처럼 느껴졌다.
3분쯤 걸었을 때 벽에 갈림길이 나타났다. 왼쪽과 오른쪽. 횃불을 두 방향에 비춰봤다. 둘 다 어둠이었다. 왼쪽 통로의 바닥에 먼지가 균일하게 쌓여 있었다. 아무도 지나간 적이 없다는 뜻이다. 오른쪽도 마찬가지였다. 발자국은 없었다.
리온은 귀를 세웠다. 반엘프의 청각이 두 통로에서 흘러오는 공기를 읽었다. 왼쪽에서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정적. 오른쪽에서는 — 아주 미세하게 — 공기가 흐르는 소리가 있었다. 바람이 아니라 공기의 이동. 어딘가 넓은 곳과 연결되어 있다는 신호.
문양의 빛이 깜빡였다. 오른쪽 벽에서만.
"오른쪽이야."
리온이 따라갔다. 오른쪽 통로에 들어서자 바닥의 먼지가 부츠 밑에서 바스락거렸다. 천 년 동안 쌓인 먼지 위에 찍히는 첫 번째 발자국. 리온의 것이거나, 10년 전 탐사대의 것이 이미 먼지에 묻혀 보이지 않거나.
횃불이 더 짧아졌다. 손가락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불꽃이 가까워진 것이다. 천이 줄어들고 있었다. 5분. 10분이면 끝이다.
리온은 속도를 올렸다. 뛰지는 않았다. 이 어둠 속에서 뛰다가 바닥의 돌출부에 걸려 넘어지면 횃불이 꺼진다. 그러면 끝이다. 빠르게 걷되 발을 확실히 내딛으며.
---
엘시와 볼턴은 멈춰 서 있었다.
앞에 갈림길이 있었다. 세 갈래. 발광 이끼의 녹색빛이 세 방향의 입구를 어렴풋이 비추고 있었다. 이끼의 빛은 약했다. 1미터 반 정도만 비추는 빛이어서 갈림길 안쪽은 어둠이었다. 세 개의 어두운 구멍이 나란히 입을 벌리고 있었다.
"어디로 가요?"
엘시가 물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으려고 애쓰는 톤이었다.
"내가 어떻게 알아."
볼턴이 말했다.
"지도도 없고, 기준도 없고. 이 안에서 길을 찾을 방법이 없어."
"하나씩 가보는 건요?"
"가보고 막히면? 돌아올 체력이 있어? 나는 없어."
볼턴이 벽에 등을 기대며 주저앉았다. 숨이 거칠었다. 늙은 몸이 한계에 가까웠다. 무릎이 아까 바닥에 부딪힌 후로 계속 쑤시고 있었다. 앉자마자 허벅지 근육이 경련을 일으켰다. 볼턴은 이를 악물고 참았다. 엘시 앞에서 신음을 내고 싶지 않았다.
"교수님."
"……잠깐만. 좀 쉬자."
엘시가 볼턴 옆에 앉았다. 유리병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녹색빛이 두 사람의 얼굴을 비췄다. 볼턴의 얼굴에 그림자가 깊었다. 주름이 더 깊어진 것 같았다. 입꼬리가 내려가 있었고, 눈 밑에 어두운 그늘이 져 있었다. 60년을 마법과 함께 산 남자가 빈손으로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엘시는 자기 손을 봤다. 로브 소매를 걷어 올린 팔뚝에 먼지가 묻어 있었다. 손가락 끝이 차가웠다. 유적 안의 공기가 체온을 빼앗고 있었다. 유리병의 미지근한 온기가 무릎을 통해 올라왔다. 발광 이끼는 빛을 내면서 약간의 열도 냈다. 그것이 지금 유일한 온기였다.
"교수님."
"뭐."
"무서워요?"
볼턴이 엘시를 봤다. 주근깨가 있는 얼굴. 녹색빛 아래에서 주근깨가 더 진하게 보였다. 스물두셋의 제자가 늙은 교수에게 '무섭냐'고 묻고 있었다.
"……아까 뼈 봤잖아. 10년 동안 여기서 죽은 사람."
"봤지."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잖아요."
볼턴은 대답하지 않았다. 벽에 기댄 채 천장을 올려다봤다. 천장은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다. 그냥 어둠이었다.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무서워."
엘시가 고개를 돌렸다. 교수님의 입에서 그 단어가 나올 줄은 몰랐다. 학회에서 후배 교수의 논문을 삼십 분 동안 질타하던 사람이다. 제자의 실수에 책상을 때리던 사람이다. 무서운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60년 동안 무서운 적이 별로 없었어. 학회에서 논문이 거절당하는 게 제일 무서웠지. 웃기지?"
볼턴이 코웃음을 쳤다. 건조한 웃음이었다. 유머가 아니라 자조였다.
"내 인생에서 가장 큰 공포가 '학술지 리젝트'였어. 사람이 죽는 것도, 전쟁이 터지는 것도 나한테는 남의 일이었거든. 마법이 있으니까. 마법이 있으면 뭐든 해결할 수 있었어. 불을 만들고, 벽을 세우고, 적을 막고. 60년 동안 단 하루도 마법 없이 산 적이 없는데."
볼턴의 손이 무릎 위에서 떨렸다. 열 손가락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여기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마법사라는 타이틀이 아무 의미도 없어. 그냥 늙은이야."
"그냥 늙은이가 아니에요. 교수님은 마법이 없어도 지식이 있잖아요."
"지식으로 돌을 부수냐?"
"돌을 부수지는 못해도, 어디로 가야 할지는 알 수 있잖아요."
볼턴이 엘시를 봤다. 엘시의 주근깨 위로 먼지가 묻어 있었다.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뼈를 봤을 때 울었던 것이다. 지금은 울지 않고 있었다. 입술이 다물려 있었고, 시선이 볼턴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볼턴은 한숨을 쉬고 유리병을 집어 세 갈래 갈림길을 비췄다. 손이 아직 떨렸지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람."
"네?"
"공기가 흐르는 방향을 봐. 밀폐된 공간이면 바람이 없어. 바람이 불어오는 쪽이 더 넓은 공간으로 이어져 있을 가능성이 높아."
엘시의 눈이 커졌다. 마법이 아니었다. 물리학이었다. 60년 동안 마법만 연구한 게 아니었다. 이 사람의 머릿속에는 마법 이전의 것들도 쌓여 있었다.
볼턴이 유리병을 왼쪽 갈림길 입구에 가져다 댔다. 이끼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약했다. 가운데. 유리병을 가져다 대자 이끼가 흔들리지 않았다. 정적. 공기의 이동이 없었다. 오른쪽.
이끼가 확실하게 흔들렸다. 유리병 안에서 녹색 줄기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오른쪽 통로 안쪽에서.
"오른쪽이야."
볼턴이 벽을 짚고 일어섰다. 무릎이 삐걱거렸다. 얼굴을 찡그렸지만 말하지 않았다.
"가자. 앉아 있으면 죽어."
엘시가 유리병을 들고 앞장섰다. 볼턴이 뒤를 따랐다. 엘시는 걸으면서 한 번 뒤를 돌아봤다. 교수님이 걷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볼턴의 회색 수염이 녹색빛 아래에서 흔들렸다. 걷고 있었다. 느리지만, 걷고 있었다.
---
넬은 도끼를 앞에 세우고 앉았다.
어둠. 소리 없음. 횃불도 없었다. 넬의 짐에는 불을 피울 도구가 없었다. 도끼와 마른 식량 약간뿐이었다. 마른 고기를 한 조각 씹었다. 딱딱했다. 침이 부족해서 잘 씹히지 않았다. 목이 말랐지만 물도 없었다. 그래도 씹었다. 체력을 유지하려면 먹어야 했다. 씹는 동안 어둠을 봤다. 어둠은 똑같이 어둠이었다.
눈이 어둠에 적응하기를 기다렸다. 5분. 10분. 희미하게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천장의 결정에서 아주 미세한 빛이 남아 있었다. 별빛보다 약한, 눈을 가늘게 뜨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빛. 통로의 윤곽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벽과 천장의 경계. 바닥의 석판 이음새. 그것만 보였다.
넬은 일어섰다. 도끼를 어깨에 걸치고 걸었다.
벽을 손으로 짚으며. 한 발씩. 결정의 미세한 빛을 따라. 왼손으로 벽을 짚고 오른손으로 도끼를 잡았다. 벽면의 돌이 손바닥을 스쳤다. 거친 표면. 문양의 홈이 손끝에 걸렸다 지나갔다. 홈. 평면. 홈. 평면. 규칙적이었다.
말이 없었다. 원래 말이 없는 남자였지만, 지금은 다른 의미의 침묵이었다. 말할 상대가 없었다. 혼잣말은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입을 열 이유가 없으면 열지 않았다. 발소리와 벽을 짚는 소리만 통로에서 울렸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20분쯤 걸었을 때.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 넬은 멈춰 도끼를 내렸다. 전투 태세. 어깨 폭만큼 다리를 벌리고, 도끼를 비스듬히 내려 잡고, 무게 중심을 낮췄다. 어둠 속에서 소리의 방향을 읽었다. 앞쪽. 30미터쯤. 한 사람의 발소리. 불규칙했다. 비틀거리는 리듬.
어둠 속에서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거기 누구야."
넬이 말했다. 짧고 낮은 목소리가 통로를 울렸다.
"……넬?"
하르만 박사의 목소리였다. 떨리고, 갈라지고, 안도가 섞인 목소리.
박사가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결정의 미세한 빛 아래에서 윤곽이 먼저 보였다. 마른 체형. 안경이 한쪽만 남아 있었다. 다른 쪽 안경다리가 부러져 렌즈가 빠져 있었다. 외투가 찢어져 있었다. 어깨 부분이 벽에 긁힌 듯 천이 해져 있었다. 살아 있었다.
"박사."
"살아 있었군요."
박사가 숨을 내쉬었다. 내쉬는 숨이 길었다. 한참을 참고 있었다는 듯이. 다리가 풀렸는지 벽에 기대앉았다. 등이 벽에 닿자 돌 긁히는 소리가 났다. 박사의 손에 노트가 있었다. 빨려 들어가는 와중에도 놓지 않은 것이다. 양피지 노트. 가장자리가 구겨져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모릅니다. 빨려 들어간 후로 아무도 못 봤어요. 혼자 걸었습니다. 한 시간쯤. 아마. 시간 감각이 정확하지 않지만."
박사가 안경의 남은 한쪽을 고쳐 올렸다. 한쪽 눈으로만 보이는 세상. 넬을 올려다봤다. 어둠 속에서 넬의 윤곽이 보였다. 넓은 어깨와 도끼의 실루엣.
넬이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가자."
넬이 손을 뻗었다. 박사가 잡았다. 넬의 손은 크고 거칠었다. 흉터가 잡힌 손바닥이 박사의 학자 손을 감쌌다. 일어섰다. 박사의 무릎이 떨렸지만 섰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걸었다. 어둠 속에서. 벽을 짚으며. 넬이 왼쪽 벽, 박사가 오른쪽 벽. 통로의 양 벽을 짚으며 걸었다. 넬의 발소리는 무겁고 일정했다. 박사의 발소리는 가볍고 불규칙했다. 두 리듬이 겹쳤다.
박사가 중얼거렸다.
"무작위가 아니에요."
"뭐?"
"빨려 들어오기 직전에 봤어요. 바닥 문양이 움직이고 있었어요. 석판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회전했어요. 기제가 작동한 거예요. 천 년 된 기제가."
넬은 대답하지 않았다. 걸음을 멈추지도 않았다.
"카엘 씨가 걸어가니까 문양이 수렴했어요. 빛이 카엘 씨에게 모여드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 직후에 기제가 작동했고. 우연이 아닌 것 같아요. 유적이 카엘 씨에게 반응한 거예요. 석문에서도 그랬고, 통로에서도 그랬으니까."
넬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벽을 짚는 손이 홈을 지나갔다. 홈. 평면. 홈.
"다른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 카엘 씨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이건 사고가 아니에요. 유적이 뭔가를 한 거예요."
"그래서?"
"그래서요?"
"그래서 어떡하자고."
박사가 잠시 침묵했다. 넬의 질문이 명확했기 때문이었다. 원인을 분석한다고 현재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 이유를 알아도 길은 여전히 어둡고, 출구는 여전히 없다.
"……나가야죠. 살아서."
"그거면 됐어."
넬이 앞으로 걸었다. 박사가 뒤를 따랐다. 넬의 넓은 등이 앞에서 어둠을 갈랐다. 박사는 그 등을 보며 걸었다. 보인다기보다는 느꼈다. 앞에 사람이 있다는 것. 혼자가 아니라는 것. 그것만으로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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