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보자, 하늘.

크로노리프트 5화 기억의 바닥 #02 본문

넉두리, 번뇌/Play Book

크로노리프트 5화 기억의 바닥 #02

가온아 2026. 4. 24. 11:00

카엘은 원형 홀에서 나왔다.

돌아온 통로. 빛이 발밑에서 퍼지며 길을 밝혔다. 아까보다 약했다. 결정이 죽은 후로 유적 전체의 에너지가 떨어진 것 같았다. 벽면의 문양이 빛나긴 했지만 흐릿했다. 3미터 앞까지만 보였다. 그 너머는 어둠이었다.

걸으면서 왼손을 봤다. 은빛 실선이 팔뚝까지 새겨져 있었다. 결정을 만지기 전에는 손등에만 있었다. 지금은 팔 절반을 덮고 있었다. 소매를 걷어 올려 확인했다. 팔뚝 안쪽, 힘줄이 만져지는 곳까지 실선이 닿아 있었다. 실선은 혈관을 따르지 않았다. 문양이었다. 유적 벽에 새겨진 것과 같은 곡선. 같은 패턴이 카엘의 피부 아래에 새겨져 있었다.

대가.

결정이 무언가를 보여준 대가로, 카엘의 몸에 무언가가 더 깊이 파고든 것이다. 폐광에서는 손을 대고 이틀을 잃었다. 지금은 결정을 만지고 몸이 변했다. 다음에 무언가를 만지면 뭘 잃을까. 팔 전체를 덮을까. 머리카락 전부가 은색이 될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세라의 얼굴을 떠올려봤다.

갈색 머리카락. 그건 기억난다. 어깨 아래까지 오는 길이. 단정하게 묶는 게 아니라 느슨하게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군의관이면서 머리를 묶지 않는다고 선임이 잔소리했다. 세라는 웃으며 넘겼다. 웃는 모양. 어렴풋이. 보조개가 있었다. 오른쪽 뺨에. 웃을 때만 보이는 보조개. 눈 색깔은——

떠올랐다.

호박색.

맞나? 결정을 만지기 전에는 떠오르지 않았는데, 지금은 떠오른다. 호박색. 맥주잔에 비친 불빛 같은 색. 세라의 눈이 그 색이었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게 진짜 세라의 눈인지, 결정이 보여준 비전 속 달리던 사람들의 눈인지, 구분이 안 됐다. 도시에서 달리던 여자가 있었다. 아이를 안고 달리던. 그 여자의 눈이 호박색이었을 수도 있다.

기억이 흐려지고 있었다. 새것이 들어온 자리에 옛것이 밀려나는 느낌이었다. 천 년 전 도시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무너지는 첨탑. 갈라지는 대지. 그건 방금 본 것이니까 선명한 게 당연하다. 세라의 눈이 호박색이었는지 갈색이었는지는 3년간 매일 떠올렸는데도 흐릿하다.

이것도 대가인가.

벽화 구간에 도착했다. 분리가 일어난 곳. 벽은 닫혀 있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이음새조차 보이지 않았다. 벽화의 도시가 카엘의 왼손 빛 아래에서 희미하게 보였다. 번영하는 도시와 파괴되는 도시. 방금 본 것과 같은 장면.

카엘은 벽에 손을 대봤다. 왼손.

반응이 없었다.

석문 앞에서, 측면 통로에서 벽이 열렸던 것처럼. 손을 대면 반응했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차가운 돌이 손바닥에 닿았을 뿐이었다. 실선이 새겨진 손이 돌 위에 놓여 있었다. 은빛이 약하게 맥박쳤지만 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른 벽도 만져봤다. 반응 없음. 벽화가 그려진 구간 전체를 따라 걸으며 손을 대봤다. 10미터. 20미터. 아무것도.

"……안 열려."

주먹으로 벽을 때렸다.

쿵.

돌이었다. 딱딱하고, 차갑고, 움직이지 않는 돌.

다시 때렸다.

쿵.

아무것도.

관절이 아팠다. 아까 벽을 때려 찢어진 피부가 아직 나아 있지 않았다. 딱지가 벗겨지며 다시 피가 배어 나왔다.

카엘은 벽에 이마를 대고 눈을 감았다. 이마의 차가움이 퍼졌다. 숨을 내쉬었다. 숨이 벽면에 부딪혀 따뜻하게 돌아왔다.

결정에서 뭔가를 봤다. 도시가 찢어지는 장면. 하늘에서 쏟아지는 빛. 언제인지, 어디인지 모른다.

지금 여기서 벽을 여는 데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카엘은 돌아서서 반대 방향을 봤다. 벽화 구간을 지나 왔던 길. 원형 홀 쪽.

원형 홀에 다른 통로가 있었나. 홀에 들어갔을 때는 결정에만 시선이 쏠려 있었다. 심장처럼 뛰는 결정. 몸 전체를 덮는 공명. 주변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돌아갔다.

원형 홀. 빛이 약하게 돔을 비추고 있었다. 석대 위의 결정은 투명하게 변해 있었다. 죽은 심장. 카엘이 들어서자 바닥의 문양이 희미하게 밝아졌지만, 돔 전체를 밝히지는 못했다. 절반은 어둠이었다.

카엘은 홀의 벽면을 따라 걸었다. 천천히. 빛이 따라오며 벽을 비췄다. 한 발 한 발 옮길 때마다 빛의 원이 이동했다. 벽면의 문양이 빛 아래에서 드러났다가, 지나가면 다시 어둠에 잠겼다.

동쪽 벽면에서 멈췄다.

문양이 달랐다. 다른 벽면의 문양과 패턴이 다른 구간. 크기도 컸다. 곡선이 아니라 직선이 많았다. 사각형의 테두리 안에 원이 있고, 그 안에 삼각형이 있는 문양. 문의 윤곽처럼 보였다. 높이 3미터쯤. 카엘의 키보다 한 뼘 이상 높았다.

카엘은 손을 대봤다.

반응이 없었다.

왼손을 대봤다. 은빛이 약하게 맥박쳤다. 문양에 닿은 부분이 0.5초 정도 밝아졌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제발."

카엘이 중얼거렸다. 처음으로. 이 유적에 들어온 후로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말. 카엘 자신도 놀랐다.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머리가 시킨 게 아니라 입이 먼저 움직였다.

문양이 깜빡였다. 0.5초. 그리고 꺼졌다.

다시 대봤다. 깜빡. 꺼짐. 빛이 차오르다가 중간에서 사그라드는 것 같았다. 열리려고 하는데 힘이 부족한 것처럼.

에너지가 부족한 것인가. 결정이 죽어서. 유적 전체의 동력이 떨어져서. 결정이 심장이었다면 심장이 멈춘 유적은 시체나 마찬가지였다. 시체의 문은 열리지 않는다.

카엘은 벽 앞에 주저앉았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빛은 나왔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결정은 죽었고, 유적은 꺼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여섯 명이 어딘가에서 어둠 속을 걷고 있었다.

카엘 때문에.

카엘이 걸어서 기제가 작동했다. 카엘이 가진 이것이 유적을 깨웠다. 그리고 유적은 나머지를 삼켰다. 석문 앞에서도 그랬다. 몸이 멋대로 움직여서 석문이 열렸다. 그 안으로 모두가 들어갔다. 갇혔다.

"씨발."

목소리가 홀에서 울렸다. 돔 천장에 부딪히고 돌아왔다. 메아리가 두 번 울리고 사라졌다.

카엘은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주먹을 쥐었다. 은빛이 맥박쳤다. 쓸모없는 빛이. 문을 열 수 없고, 사람을 잡을 수 없고, 길을 찾을 수 없는 빛이. 나오기만 하고 아무것도 못 하는 빛이 카엘의 주먹 안에서 조용히 뛰었다.

1분이 지났다. 아마. 시간 감각이 정확하지 않았다.

카엘은 눈을 떴다. 일어섰다. 다리가 아직 떨렸지만 섰다.

앉아 있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석대 뒤쪽. 아까 돌아보지 않았던 방향. 가봐야 했다.

---



리온의 횃불이 꺼졌다.

어둠이 삼켰다. 완전한 어둠. 눈을 뜨나 감으나 같았다. 횃불의 마지막 불꽃이 치직거리며 죽었다. 연기가 올라왔다. 코끝에 기름 타는 냄새가 남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리온은 멈췄다. 숨을 내쉬었다.

"……하."

어둠 속에서 혼자. 눈도 소용없다. 반엘프의 시력도 빛이 완전히 없으면 무력하다. 어둠이 눈을 덮었다. 손을 눈앞에 가져다 대봤다. 보이지 않았다. 자기 손이 거기 있는지 없는지 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었다. 손가락을 움직여봤다. 근육이 움직이는 감각은 있었다. 보이지 않았다.

공포가 올라왔다. 목 아래에서부터. 위장을 누르는 무게 같은 것. 리온은 그것을 알아차렸다. 알아차리고, 입꼬리를 올렸다. 보이지 않는 미소.

"금화 50 준다고 했을 때 거절했어야 했나."

혼잣말. 아무도 웃어줄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말했다. 말을 하면 공포가 줄었다. 5년 동안 그래왔다.

귀는 달랐다.

리온은 눈을 감았다. 감아도 같았지만, 감으면 귀에 집중하기 쉬웠다. 귀를 세웠다. 반엘프의 청각. 인간의 네 배. 어둠 속에서 소리가 펼쳐졌다.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왼쪽 벽. 천장에서 벽을 타고 흐른 수분이 바닥에 닿는 소리. 똑. 3초 간격. 자기 심장 소리. 가슴 안에서 둔탁하게. 빠르지 않았다. 아직은. 부츠 안에서 발가락이 움직이는 미세한 마찰음. 그리고——

공기의 흐름이 들렸다. 미세한 바람. 통로 어딘가에서 공기가 이동했다. 바람의 소리가 아니라 공기가 좁은 곳을 지날 때 내는 미세한 휘파람. 귓바퀴 끝에서 잡아낸 소리.

앞쪽. 50미터 정도 전방.

그 너머에, 아주 희미하게.

발소리.

리온의 눈이 떠졌다.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어차피 보이지 않았다. 몸이 반응했다.

"……누구야?"

어둠 속으로 목소리를 던졌다. 발성 기술을 썼다. 소음 속에서도 명확하게 전달되는 톤. 정보상이 좁은 골목에서 상대에게만 들리게 말하는 기술. 통로의 벽이 소리를 반사해서 앞으로 보냈다.

1초. 2초. 3초.

"리온 씨?"

코벤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