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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노리프트 3화 균열 #01 본문

넉두리, 번뇌/Play Book

크로노리프트 3화 균열 #01

가온아 2026. 4. 19. 11:00

열흘이 지났다.

카엘은 검집을 허리에 매고 여관 방을 나섰다. 짐이라 할 것은 없었다. 검 하나, 단검 하나, 약초 주머니, 금화 몇 닢. 3년간의 용병 생활이 남긴 전부였다. 짐을 꾸리는 데 1분도 걸리지 않았다. 군대에서 배운 습관이었다. 필요한 것만, 빠르게.

방문을 닫을 때 경첩이 삐걱거렸다. 3년 동안 매일 들은 소리. 한 번도 고치지 않았다. 돌아올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아무것도 느끼지 않았다. 느끼지 않으려 했다.

계단을 내려가자 리온이 이미 카운터에 앉아 마른 과일을 씹었다. 가죽 배낭이 옆에 놓여 있었다. 새벽이었다. 다른 손님은 없었다. 주막 안에는 어젯밤의 에일 냄새와 식은 재 냄새가 남아 있었다.

"일찍이네."

"잠을 못 잤거든."

"너도?"

카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을 못 잔 건 사실이었다. 열흘간 매일 밤 그랬다. 왼손에서 은빛이 번지고, 주변 물건이 흔들리고, 라벤라 향이 사라지는 밤들. 점점 잦아졌다. 어젯밤에는 탁자 위의 물잔이 혼자 흔들렸다. 카엘이 눈을 뜨자 멈췄다. 마치 들킨 아이처럼.

주인 노파가 카운터 뒤에 섰다. 이 시간에 깨어 있을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빵 두 덩이와 물통을 내밀었다. 빵은 아직 따뜻했다. 새벽에 일부러 구운 것이다.

"여비야. 받아."

"돈 안 냈는데."

"3년치 방세로 충분하지. 살아서 돌아와."

카엘은 잠깐 노파를 봤다. 노파의 눈이 평소와 달랐다. 걱정. 아니, 체념에 가까웠다. 균열지대로 간다는 소문이 이미 퍼진 모양이다. 10년 전 들어간 22명 중 14명만 돌아왔고, 그 14명도 전부 죽었다. 소문이 퍼지면 이런 눈빛이 되는 거다.

"감사합니다."

카엘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노파는 코웃음을 치며 돌아섰다.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카운터 뒤로 사라지면서 부엌에서 그릇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평소보다 거칠었다.

리온이 과일을 삼키며 일어섰다.

"출발하자. 레칸까지 이틀이야."

두 사람은 하크라드 서문을 빠져나갔다. 새벽안개가 성벽 아래를 감쌌다. 풀잎에 이슬이 맺혔고, 어딘가에서 닭이 울었다. 성벽 위 보초는 이쪽을 보지 않았다. 새벽에 성문을 나서는 사람에게 관심을 두는 보초는 없다.

평범한 아침이었다.

평범하지 않은 여행의 시작이었다.

---

반나절을 걸었다.

칼레온 영지를 벗어나자 길이 좁아졌다. 포장도로가 사라지고 흙길이 이어졌다. 양쪽으로 참나무 숲. 나뭇잎 사이로 떨어진 햇빛이 흙길에 얼룩진 그림자를 만들었다. 마차가 가끔 지나갔지만 마주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북쪽으로 갈수록 사람이 줄었다.

리온이 앞서 걸으며 말을 걸었다.

"열흘 동안 뭐 했어?"

"검 닦았어."

"열흘 내내?"

"잠도 잤고."

"거짓말. 눈 밑에 그림자 좀 봐."

카엘은 무시했다.

사실 열흘 동안 잠을 제대로 잔 적이 없었다. 밤마다 손등에서 빛이 났다. 처음에는 잠깐 반짝이다 사라졌는데, 점점 길어졌다. 어젯밤에는 단검이 혼자 흔들렸다. 카엘이 바라보자 멈췄다. 그 다음에는 물잔. 수면이 출렁이다 카엘이 주시하면 가라앉았다.

은색 머리카락은 더 늘었다. 관자놀이를 넘어 귀 뒤까지 번졌다. 후드를 쓰지 않으면 한눈에 보일 정도였다. 거울 앞에서 그것을 볼 때마다 남의 머리카락이 자기 두피에서 자라는 것 같았다. 그리고 라벤라.

향이 아예 사라졌다. 새것을 넣어도 반나절이면 무향이 됐다. 시장 노점의 아낙은 분명 같은 라벤라를 팔았고, 다른 사람들은 향이 난다고 했다. 카엘의 손에 들어오면 사라졌다.

설명되지 않는 것을 무시하는 데 익숙했다. 무시한다고 사라지지는 않았다.

"리온."

"응."

"발투라 보고서. '미확인 에너지'라는 표현이 있었잖아."

"그래."

"더 찾은 거 있어?"

리온이 걸음을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흙길 위를 저으며.

"거의 없어. '기존 마나 측정 장비로 감지 불가'라는 문장 말고는. 대부분의 학자가 측정 오류로 치부했어. 존재 자체를 인정 안 하는 거지."

"그래."

리온이 나뭇가지를 버리고 손가락으로 가죽 벨트를 두드렸다. 톡, 톡. 진지해질 때 나오는 버릇.

"그래도 하나 재밌는 게 있긴 해. 70년 전에 칼레온 왕립도서관에서 낡은 수기를 발견했다는 기록. 대균열 직후에 쓰인 것으로 추정돼."

"뭐라 써 있었는데?"

"수기 자체는 분실됐어. 발견 기록뿐이고, 거기 한 줄만 인용돼 있어. '별빛도 아니고 불빛도 아닌, 그러나 타오르는 것.' 그게 전부야."

카엘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왼손등이 미세하게 따뜻해졌다. 반응인지 착각인지 알 수 없었다.

침묵이 흘렀다. 숲에서 새가 울었다. 느긋한 지저귐이었다. 평화로운 숲이었다. 아직은.

"리온."

"또 뭐."

"17살 때 폐광에서 빛을 만졌어."

리온의 발소리가 반 박자 늦어졌다. 가느다란 귀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계속해."

"광산 깊은 곳에서 길을 잃었어. 램프가 꺼지고 어둠 속에서 빛을 봤어. 바위틈에서. 파란빛이었는데, 은빛이었을 수도 있어. 기억이 정확하지 않아."

카엘은 앞을 봤다. 리온을 보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하는 건 처음이었다. 입 안이 건조했다. 함께 균열지대에 들어가는 사람에게 숨길 일이 아니었다.

"손을 대는 순간 온몸에 전류가 흘렀어. 이틀간 의식을 잃었고, 깨어나고 나서는 아무 일도 없었어. 11년 동안."

"그때부터 뭔가 달라진 거야?"

"아니. 그게 문제야. 11년 동안 아무것도 없었어. 그러다 한 달 전부터 갑자기."

리온의 걸음이 느려졌다. 카엘과 나란히 걷기 위해서. 평소 리온은 항상 앞서 걸었다. 의도적으로 옆에 온 거다.

"뭐가 트리거일까."

"모르겠어. 바뀐 게 없거든. 먹는 것도, 싸우는 방식도, 생활도. 전부 같아."

"노르비스 전투는?"

카엘이 잠깐 멈췄다. 부츠 밑의 흙이 바스락거렸다.

"……그때가 처음이긴 해."

"뭐가 처음?"

"세상이 느려지는 느낌. 적의 칼이 목으로 왔는데, 주변이 전부 느려진 것 같았어. 여기."

카엘이 왼쪽 목을 짚었다. 쇄골 바로 위. 노르비스 척후대원의 검이 2센치 앞까지 왔던 자리.

"그 후로부터야. 손등에 빛이 나기 시작한 게."

"죽을 뻔한 순간에 뭔가 깨어난 거야."

"그런 건지는 몰라. 그냥 순서상 그때부터라는 거야."

바람이 숲을 지났다. 나뭇잎이 서걱거렸다. 바람에 실린 흙냄새가 차갑고 축축했다. 북쪽 바람이었다.

리온이 발걸음을 멈추고 카엘을 봤다. 금색 눈에서 장난기가 빠져 있었다. 이 눈을 할 때는 드물었다. 일 년에 두세 번.

"카엘. 유적에서 답을 찾을지도 모르지만, 못 찾을지도 몰라."

"알아."

"알면서 가는 거지."

카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이 필요 없었다. 리온도 알았다. 카엘이 금화 500 때문에 가는 게 아니라는 걸. 라벤라 향이 사라지고, 머리카락이 변하고, 기억이 흐려지고 있다는 걸. 멈추지 않으면 자기가 자기가 아닌 무언가가 된다는 걸.

"가자. 해 지기 전에 산장까지 가야 해."

리온이 다시 앞서 걸었다. 평소의 간격으로. 진지한 대화가 끝났다는 신호였다.

---

해가 기울 무렵이었다.

산장에 도착하기 한 시간쯤 전. 숲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해가 나뭇가지 사이로 비스듬히 들어와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만들었다. 바람이 멈췄다. 숲이 고요했다. 새소리도 없었다.

카엘이 멈췄다.

왼손이 뜨거웠다. 갑자기. 아무런 전조 없이. 이마에 땀이 맺혔다. 지난 열흘간 밤마다 느꼈던 것과 비슷했지만, 강도가 달랐다. 낮에, 야외에서 이렇게 강하게 오는 건 처음이었다.

"왜?"

리온이 돌아봤다.

카엘은 대답하지 못했다. 왼손을 봤다. 은빛은 보이지 않았다. 피부 아래에서 무언가가 미친 듯이 뛰었다. 맥박은 아니었다. 맥박은 규칙적이다. 이건 불규칙했다. 파동처럼 밀려왔다 빠졌다.

그리고 봤다.

길 옆 참나무에서 잎사귀 한 장이 떨어지고 있었다. 떨어지는 모양이 이상했다. 왼쪽 반은 정상적으로, 중력에 끌려 아래로. 오른쪽 반은 공중에 붙은 것처럼 멈춰 있었다. 같은 잎사귀였다. 손톱만 한 참나무 잎 하나. 반쪽은 가을이고 반쪽은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잎사귀가 뒤틀리더니 찢어졌다.

가운데 맥의 선을 따라 갈라졌다. 소리 없이.

반쪽이 땅에 떨어졌다. 나머지 반쪽은 한참 뒤에야 떨어졌다. 느리게. 물속에서 가라앉듯.

"……지금 그거 봤어?"

리온이 물었다. 목소리가 달라졌다. 평소의 장난기가 없었다.

"봤어."

"뭐야 저거?"

카엘은 대답할 수 없었다. 뭔지 몰랐다. 이름이 없었다. 설명이 없었다.

주변을 둘러봤다. 다른 이상은 없었다. 평범한 숲. 평범한 길. 잎사귀 하나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었다. 새소리가 돌아왔다. 바람이 다시 불었다.

왼손의 열기가 가라앉았다. 서서히.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미세한 온기가 피부 아래에 남았다.

"……가자."

카엘이 먼저 걸었다. 리온이 뒤에서 찢어진 잎사귀를 한 번 더 봤다. 집어 들려다 그만뒀다. 땅 위의 반쪽 잎사귀는 이미 평범한 낙엽이었다. 증거는 없었다. 봤다는 기억만 남았다.

둘 다 침묵했다.

설명되지 않는 것이 하나 더 늘었다.

---

산장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돌벽에 나무 지붕을 얹은 작은 오두막. 사냥꾼들이 비박용으로 쓰는 곳인 모양이었다. 화덕에 불을 피우고 노파가 준 빵을 나눠 먹었다. 리온이 배낭에서 마른 고기와 과일을 더 꺼냈다.

카엘은 화덕 불을 보며 앉았다. 불꽃이 정상적으로 흔들렸다. 규칙적이고 자연스러운 불꽃. 낮의 잎사귀를 생각했다. 불꽃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반쪽만 멈추고 반쪽만 타는 불.

"자."

리온이 말했다.

카엘은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왼손이 미지근했다. 낮보다 약했지만 여전히 거기 있었다. 북쪽으로 갈수록 강해지는 건지, 시간이 지나면서 강해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새벽에 눈을 떴을 때 리온은 이미 짐을 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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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오후.

레칸 마을이 보였다.

칼레온 영지 최북단의 작은 마을. 발투라 균열지대로 가는 마지막 보급 거점. 돌담 울타리 안에 목조 건물 서너 채가 전부였다. 밭도 보이지 않았다. 척박한 땅. 사는 사람보다 지나가는 사람이 많은 마을.

마을 입구의 주막 앞에 마차 두 대가 서 있었다. 짐이 가득 실려 있었다. 탐사 장비, 식량, 텐트. 짐을 슬쩍 본 것만으로 비용 추정이 됐다. 금화 100은 넘는다. 의뢰한 자가 누구든, 진지했다.

"저거야."

리온이 턱으로 가리켰다.

주막 안으로 들어가자 다섯 명이 테이블에 모여 있었다.

카엘은 문 앞에서 멈춰 한 사람씩 훑었다. 습관이었다. 새 공간에 들어서면 출입구 위치를 먼저 확인하고, 그 다음 사람을 읽는다. 위협 순위를 매기는 게 아니라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를 판단하는 것. 전장에서 살아남는 법은 적을 읽는 것이 아니라 아군을 읽는 것이었다.

상석에 앉은 남자. 서른 초반. 깔끔한 외투에 가죽 서류 가방. 안경 너머의 눈이 날카로웠다. 코벤. 현장 책임자. 칼을 쥔 적 없는 손. 손가락 아래에서 계산이 돌아간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카엘이 들어선 순간 눈동자가 잠깐 움직였다. 아래위를 훑었다. 용병을 평가하는 시선이 아니었다. 상품을 감정하는 시선이었다.

옆에 젊은 여자. 스물두셋쯤. 짧은 갈색 머리에 주근깨. 로브 소매를 걷어 올리고 양피지에 뭔가를 적었다. 마법사. 들어오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눈이 반짝였다. 두려움이 아니라 호기심. 균열지대에 가는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소풍을 가는 사람의 눈이었다.

맞은편에 늙은 남자. 예순이 넘는 회색 수염. 입이 꾹 다물려 있었다. 또 다른 마법사. 로브의 질이 좋았다. 학자 로브가 아니라 교수 로브. 수십 년의 지위가 옷감에 배어 있었다. 카엘이 들어와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용병에게 관심이 없는 거다.

학자. 사십대 중반. 안경을 코끝에 걸치고 서적을 펼쳤다. 고고학자. 손가락이 책 위를 더듬었다.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아니라 글자를 따라가며 읽었다. 몰입의 깊이가 손끝에서 보였다.

용병. 넓은 어깨에 짧은 머리. 팔뚝에 흉터가 여러 개. 도끼를 등에 졌다. 테이블에 앉아 있었지만 등을 벽에 붙이고 있었다. 카엘과 같은 습관. 출입구가 보이는 자리. 카엘이 들어서자 시선이 왔다. 짧았다. 위협이 아님을 확인하고 시선을 돌렸다. 쓸데없는 행동이 없는 남자였다.

코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엘을 봤다. 아래위를 한 번 더 훑었다.

"카엘 씨?"

"그래."

"코벤입니다. 이번 탐사의 현장 책임자예요."

악수를 했다. 손이 차가웠다. 악력은 형식적이었다. 이 남자는 악수를 인사가 아니라 측정으로 쓰는 타입이다.

"리온 씨에게 이력은 들었습니다. 독립 용병, 전장 경험 다수."

"그래."

간단한 소개가 이어졌다. 엘시 로번, 마법사. 볼턴, 마법학 석좌교수. 하르만, 고대사 전공 고고학자. 넬, 보조 호위.

엘시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카엘을 봤다.

"혹시 '회색 칼날'이에요? 그 유명한?"

"아니."

리온이 옆에서 킥킥 웃었다. 카엘은 무시했다. 넬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 말이 없었다. 도끼 자루에 손을 얹은 채. 무기를 놓지 않는 타입. 좋았다.

코벤이 양피지를 펼쳤다. 일정과 경로를 설명했다. 레칸에서 발투라 외곽까지 하루 반. 외곽에서 유적 입구까지 반나절. 탐사 기간 3일.

"탈출 경로는?"

카엘이 물었다.

코벤이 잠깐 멈췄다. 일반 호위 용병이 탈출 경로를 먼저 묻지는 않으니까.

"물론 준비되어 있습니다."

"보여줘."

코벤이 지도를 펼쳤다. 탈출 경로 세 가지가 표시돼 있었다. 동쪽 계곡, 서쪽 능선, 남쪽 원로. 카엘은 1분간 지도를 봤다. 등고선, 수원, 합류점. 전장에서 지도를 읽는 법과 같았다. 탈출 경로가 있다는 건 위험하다는 뜻이고, 세 개나 준비했다는 건 하나로는 부족할 수 있다는 뜻이다.

"됐어."

카엘이 의자에 앉았다. 출입구가 보이는 자리를 골랐다.

평범한 의뢰 브리핑이었다. 위험 지대 탐사에 걸맞은 준비와 인원. 금화 500이라는 비정상적인 보수를 제외하면.

카엘은 외투 깃을 당겨 관자놀이의 은색 머리카락을 가렸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아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