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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노리프트 2화 멈춘 것들 #02 본문

넉두리, 번뇌/Play Book

크로노리프트 2화 멈춘 것들 #02

가온아 2026. 4. 18. 11:00

밤.

2층 방. 삐걱거리는 마루, 갈라진 벽, 얼룩진 천장. 창 너머로 하크라드의 불빛이 드문드문 보였다. 대부분의 집이 이미 불을 끈 시간이었다. 주막 1층에서 올라오는 용병들의 웃음소리가 마루 사이로 희미하게 새어 들었다.

카엘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탁자 위에는 리온이 두고 간 양피지, 라벤라 주머니, 그리고 단검 하나.

양피지를 다시 읽었다. 미확인 에너지. 감지 불가. 결정체. 접촉한 세 명이 먼저 죽었다.

자기 몸에 일어나는 일과 그 보고서 사이에 관련이 있는지 몰랐다. 은색 머리카락이 에너지와 관련이 있는지, 라벤라 향이 사라지는 것이 변화의 일부인지, 시장에서 일어난 일이 진짜였는지. 전부 몰랐다. 알 수 없는 것들이 쌓였다. 무시로 처리할 수 있는 양을 넘어서고 있었다.

라벤라 주머니를 집었다. 코에 가져갔다. 향이 없었다. 아침에 산 꽃이다. 반나절 만에 완전히 사라졌다.

내려놓았다.

단검을 봤다.

별 생각 없이 손에 들었다. 칼날이 촛불빛을 반사했다. 손잡이의 가죽이 닳아 있었다. 10년 넘게 쓴 단검. 균형이 좋았다. 무게 중심이 칼날의 1/3 지점에 있어서 던지기에도 적합했다.

탁자 위에 놓았다.

놓는 순간, 왼손등에서 은빛이 번졌다.

카엘이 숨을 멈췄다.

이번에는 달랐다. 물방울이 떠오른 사흘 전과도, 시장에서 세상이 멈춘 낮과도. 이번에는 카엘이 보고 있는 앞에서, 분명한 의식 상태에서, 은빛이 손등을 타고 올라왔다. 손목까지. 혈관의 선을 따라. 파란빛이 섞여 있었다. 은색과 청색이 피부 아래에서 교차하며 맥을 쳤다.

아프지 않았다. 뜨거웠지만 화상이 아니었다. 심장이 빨라졌지만 공포가 아니었다. 뭐였을까. 가장 가까운 감각은 — 울림. 몸속 어딘가에서 시작된 진동이 왼손까지 타고 올라온 것 같았다.


단검이 움직였다.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단검이 미세하게 떨렸다. 칼날이 좌우로 0.5밀리미터쯤 진동했다. 촛불빛이 칼날 위에서 흔들렸다.

카엘은 단검을 봤다.

단검이 떠올랐다.

1센티미터. 2센티미터. 탁자 표면에서 칼날이 분리됐다. 그림자가 칼 밑에 생겼다. 균형이 불안정했다. 칼날이 한쪽으로 기울었다가 반대쪽으로 기울었다. 마치 줄타기를 하듯.

카엘의 왼손이 떨렸다.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을 '하고' 있는 건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단검이 떠오른 것과 자기 손에서 빛이 나는 것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는 건지. 아니면 둘 다 다른 원인에서 비롯된 별개의 현상인 건지.

3센티미터.

단검이 수평을 잡았다. 잠깐. 완벽한 수평이었다. 그림자가 선명했다.

그리고 떨어졌다.

탁 소리를 내며 탁자 위에 떨어졌다. 촛불이 흔들렸다.

은빛이 사그라들었다. 손등에서 손목으로, 손목에서 피부 아래로. 왼손 전체가 축 늘어졌다. 팔 전체가 무거웠다.

카엘은 자기 손을 봤다.

된 건가. 아닌 건가.

단검은 떠올랐다. 확실히. 3센티미터. 카엘이 한 것인지 아닌지 확신이 없었다. 의도하지 않았다. 집중하지도 않았다. 손에서 빛이 나고, 단검이 떴다. 순서상 그랬을 뿐이다. 인과관계인지 동시 발생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코에서 무언가 흘렀다. 손가락으로 닦았다. 피. 콧피였다. 왼쪽 콧구멍에서 한 줄기. 많지 않았다. 헝겊으로 닦아냈다.

라벤라 주머니를 집어 코에 가져갔다. 습관이었다.

향이 없었다. 완전히. 아침에 산 것인데. 아까 시장에서 코에 대었을 때는 있었는데.

카엘은 주머니를 내려놓았다. 침대에 등을 기대고 천장을 봤다. 얼룩진 천장. 3년간 매일 본 천장.

세라의 눈 색깔을 떠올리려 했다. 떠오르지 않았다.

보조개의 깊이를 떠올리려 했다. 떠오르지 않았다.

라벤라의 향을 기억하려 했다. 기억나지 않았다. 어떤 향이었는지. 쓸쓸한 향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쓸쓸하다는 건 감상이지 향이 아니다. 구체적인 향. 코끝에 닿는 그것. 사라졌다.

전부 사라지고 있었다.

카엘은 눈을 감았다. 라벤라 주머니를 심장 위에 올렸다. 매일 밤 그렇게 했다. 향이 있든 없든.

잠이 오지 않았다.

새벽이 가까워질 무렵 일어나 탁자 앞에 앉았다. 양피지를 펼쳤다. 리온이 두고 간 보고서. 미확인 에너지. 결정체. 균열지대.

발렌의 의뢰였다.

발렌 아슈포드. 3년 전 카엘의 부대를 미끼로 사용한 남자. 37명이 죽었다. 세라가 죽었다. 그 남자의 돈을 받을 수 없었다. 그건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손등을 봤다. 은빛은 사라져 있었다. 피부 아래의 온기는 남아 있었다.

시장에서 세상이 멈췄다. 단검이 떠올랐다. 향이 사라지고, 머리카락이 변하고, 기억이 흐려지고 있다. 이것이 뭔지 모른다. 멈출 줄도 모른다. 멈출 수 있는지조차 모른다.

발투라 균열지대에 답이 있는지도 모른다.

여기에는 확실히 없었다.

카엘은 양피지를 접었다.

창밖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새벽의 첫 빛이 하크라드 굴뚝 위를 비췄다.

---

아침.

리온이 주막에 왔을 때 카엘은 이미 1층에 앉아 있었다. 물잔 하나를 앞에 놓고. 출입구가 보이는 자리. 양피지가 탁자 위에 펼쳐져 있었다.

리온이 의자를 빼며 앉았다. 카엘의 얼굴을 봤다. 금색 눈동자가 좁아졌다. 카엘의 눈 밑에 그림자가 짙었다. 밤새 잠을 못 잔 얼굴이었다.

"읽었네."

"그래."

"결론은?"

카엘은 물잔의 수면을 봤다. 잔잔했다.

"의뢰 받겠어."

리온의 귀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반엘프의 반사. 놀랐을 때 나오는.

"사흘 전에 거절했잖아."

"바뀌었어."

"뭐가?"

대답하지 않았다. 뭐가 바뀌었는지 말로 설명할 길이 없었다. 시장에서 세상이 멈춘 걸 봤다고? 단검이 떠올랐다고? 세라의 눈 색깔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전부 미친 소리였다. 미친 소리가 아닐 가능성이 카엘을 무겁게 짓눌렀다.

"금화 때문은 아닌 거지."

"아니."

"그럼 뭐 때문인데."

카엘이 물잔을 들었다.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답을 찾아야 해."

리온이 잠깐 카엘을 봤다. 금색 눈에서 계산이 사라졌다. 그 자리에 다른 무언가가 떠올랐다. 리온이 진지해질 때 서너 번 보이는 눈. 카엘을 걱정하는 눈. 리온은 그것을 금세 감췄다. 살구를 꺼내 입에 넣으며, 평소보다 조금 세게 씹었다.

"좋아. 그럼 준비해야 할 거 있어. 인원 구성, 장비, 루트 계획——"

"맡겨."

"……금화 50은 선불로 받을 수 있을 거야. 중개소 계약 조건에——"

"필요 없어."

리온이 과일 씹는 것을 멈췄다.

"금화 500을 안 받겠다고?"

"받아. 그 돈은 네가 가져. 정보 비용이랑 조율 비용으로. 넉넉하잖아."

"……아, 그 말이야? 나야 좋지만."

리온의 말에 장난기가 돌아왔다. 눈은 웃지 않았다. 카엘이 금화에 관심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카엘이 돈 때문에 움직이는 사람이었으면 3년 전에 발렌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열흘 줘. 인원 모으고, 루트 짜고, 보급 준비까지."

"그래."

카엘이 일어섰다. 양피지를 접어 품에 넣었다. 계단을 올라갔다.

혼자 남은 리온이 마른 과일을 삼키고, 빈 물잔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금화 500이 이렇게 쓸까. 아니, 이건 금화 0원짜리 의뢰지."

아무도 듣지 않았다.

---

밤.

카엘은 침대에 누워 라벤라 주머니를 심장 위에 올렸다. 향이 없는 천 주머니. 세라가 만든 것. 바느질 땀이 고르지 않았다. 군의관이라 바느질은 잘했지만, 약초 주머니는 대충 만들었다. "어차피 속에 들어가는 건 꽃이잖아"라고 했다. 그 목소리가 기억나는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었다. 목소리의 높낮이가 희미해졌다. 말투는 기억났다. 소리가.

카엘은 주머니를 꾹 눌렀다.

창문 너머로 하크라드의 밤이 고요했다. 대장간은 멈췄고, 시장은 비었고, 성벽 위에 횃불만 깜빡였다.

도리안의 말이 떠올랐다. 죽지 마. 간단한 명령이었다. 이행하기 어렵지 않은. 원래는.

자기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 뭔지 모르는 채로 균열지대에 들어가는 것이 죽지 않는 방법인지, 아니면 죽는 방법인지.

알 수 없었다.

여기 있어도 답은 없었다.

눈을 감았다. 잠은 오지 않았다. 새벽까지.

---

같은 시각.

하크라드 도시 반대편. 시계탑.

낡은 시계탑이었다. 문도 없고 계단은 반쯤 부서져 있었다. 시계는 멈춘 지 오래였다. 바늘이 녹슬어 12시 7분에서 굳어 있었다. 아무도 올라가지 않는 곳.

꼭대기에 여자가 서 있었다.

짧은 흑발. 창백한 피부. 검은 로브. 손이 비정상적으로 가늘었다. 왼쪽 손목에 문양이 있었다. 원 안에 삼각형, 그 안에 다시 원. 의미는 불명이었다.

여자의 손에 수정구가 놓여 있었다. 투명한 구체. 안개가 든 유리처럼 안쪽이 탁했는데, 지금은 내부에서 빛이 돌고 있었다. 은색. 미세하게. 회전.

여자의 눈이 수정구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감정이 없는 얼굴. 놀라지도, 기뻐하지도 않았다.

"반응."

낮고 차분한 목소리. 감정을 삭제한 음성.

수정구의 은빛이 한 번 맥을 쳤다. 여자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한 달 전부터 이 도시에서 분류할 수 없는 에너지를 감지했다. 기존 마나 측정으로는 잡히지 않는 것. 학사원 장비로도, 칼레온 연구소 장비로도 분류 불가. 하지만 이 수정구에는 반응했다. 정체를 특정할 수 없었다. 다만 농도가 변하고 있었다. 한 달 전보다 짙어지고 있었다.

오늘 오후. 반응이 폭증했다. 수정구 내부의 안개가 처음으로 색을 띠었다. 은색. 짧았다. 찰나에 사라졌다. 하지만 분명했다. 누군가가, 이 도시 안에서, 적성을 가진 자가 발현했다.

여자는 수정구를 로브 안에 넣었다.

하크라드의 밤을 내려다봤다. 꺼진 창문들. 지붕 위의 달빛. 어딘가에 있을 사람.

입이 열렸다.

"……당신은 달랐으면 좋겠어요."

아무에게도 닿지 않는 말이었다. 바람이 가져갔다.

여자는 계단을 내려갔다. 부서진 난간을 피해, 빛 없이, 소리 없이. 어둠 속으로.

시계탑이 다시 비었다.

녹슨 바늘이 12시 7분을 가리켰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