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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노리프트 2화 멈춘 것들 #01 본문

넉두리, 번뇌/Play Book

크로노리프트 2화 멈춘 것들 #01

가온아 2026. 4. 17. 11:00

사흘이 지났다.

카엘은 검을 닦았다. 여관 방 창가에 걸터앉아, 기름 묻힌 헝겊으로 칼날을 훑었다. 반복. 위에서 아래로. 위에서 아래로. 날이 충분히 깨끗해진 뒤에도 손은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생각을 해야 했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창밖에서 대장간 소리가 울렸다. 쇠를 때리는 규칙적인 타격. 그 사이사이로 골목 시장의 소음이 들어왔다. 고기 굽는 냄새, 가죽 다루는 냄새, 아이들이 뛰는 소리. 하크라드 하부 도시의 평범한 아침이었다.

왼손등이 따뜻했다. 어젯밤부터 이어지는 온기였다. 사흘 전 물잔의 물방울이 떠오른 이후로 손등의 온기가 돌아오는 간격이 짧아졌다. 처음에는 하루에 한 번. 어제는 세 번. 오늘은 아침부터 가시지 않았다. 관자놀이의 은색 머리카락이 귀 뒤까지 번져 있었다. 아침에 물을 받으러 가면서 거울을 봤다. 후드를 쓰지 않으면 보인다. 남의 것이 자기 두피에서 자라는 느낌. 그리고 라벤라.

탁자 위의 약초 주머니를 집어 코에 가져갔다. 아침에 새것으로 갈아 넣었다. 시장에서 산 라벤라, 세 묶음에 동화 12. 노점 아낙은 향이 좋다고 했다. 다른 손님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카엘의 코에는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반나절도 안 돼서 무향이 됐다. 이틀 전에는 하루는 버텼다. 그 전에는 이틀. 점점 빨라졌다. 꽃이 상한 건지, 자기 코가 이상해진 건지. 시장에서 다른 사람이 같은 꽃의 향을 맡는 걸 봤다. 카엘의 손에 들어오면 사라졌다.

세라가 만들어준 주머니였다. 라벤더와 캐모마일. 세라의 손이 바느질한 천. 향은 3년간 매일 새것으로 바꾸며 지켜왔다. 그것이 전부였다. 세라의 목소리는 이미 희미해졌고, 보조개가 있던 위치는 기억나지만 깊이가 떠오르지 않았다. 눈 색깔은.

갈색이었나. 호박색이었나.

검을 닦는 손이 멈췄다. 카엘은 주머니를 내려놓았다. 천장의 얼룩을 봤다. 3년 동안 매일 봤지만 한 번도 모양을 기억한 적 없는 얼룩. 세라의 눈 색깔이 그 얼룩처럼 되어가고 있었다. 매일 보면서 기억하지 못하는 것.

문이 열렸다.

노크 없이. 세상에 카엘의 방문을 노크 없이 여는 인간은 한 명뿐이었다.

"좋은 아침."

리온이 들어왔다. 검은 후드를 뒤로 젖히고, 마른 과일 한 줌을 씹으며. 반엘프 특유의 가느다란 귀가 후드 밖으로 드러나 있었다. 금색 눈동자가 방 안을 훑었다. 검, 기름 헝겊, 라벤라 주머니, 빈 물잔. 한눈에 상황을 읽는 눈이었다.

"뭔 일이야."

"반갑다고 해주면 안 돼?"

카엘은 검을 칼집에 넣었다.

리온이 탁자에 걸터앉았다. 삐걱거리는 나무가 리온의 무게에 항의했다. 리온은 가죽 가방에서 양피지 뭉치를 꺼냈다. 구겨진 가장자리, 왁스로 봉인된 흔적. 여러 출처에서 온 문서들이었다.

"발투라 보고서. 상세본 구해왔어."

카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흘 전에 말했잖아. 대균열 유적 탐사 의뢰. 금화 500."

"거절했어."

"그래, 거절했지. 근데 보고서는 한 번 보라고."

리온이 양피지를 탁자 위에 펼쳤다. 손가락으로 한 구절을 짚었다.

"10년 전 제국 탐사대가 발투라 균열지대에 들어갔어. 22명. 14명 돌아왔고, 돌아온 14명은 3개월 안에 전부 죽었어. 여기까지는 사흘 전에 말한 거지."

"그래."

"새로 구한 게 이거야. 탐사대 생존자 중 한 명이 귀환 직후 쓴 보고서. 제국 학사원 기밀 문서인데, 돈을 좀 쓰긴 했어."

리온의 목소리에서 장난기가 빠져 있었다. 드문 일이었다. 리온이 진지해지는 건 일 년에 서너 번이다. 그때마다 카엘은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핵심은 두 가지야. 첫째, '기존 마나 측정 장비로 감지 불가한 에너지가 관측됨.' 이건 전에도 말했어. 둘째가 새로운 거야."

리온이 양피지의 한 단락을 짚었다.

"'균열 중심부에서 결정체 발견. 청백색. 주먹 크기. 극도로 단단. 단검으로 깎이지 않음. 결정 주변에서 미확인 에너지의 농도가 급격히 상승. 기존 장비로 측정 불가하나 신체적으로 감지 가능—심장 박동 불규칙, 시야 왜곡, 이명.' 여기까지가 보고서 원문이야."

카엘의 시선이 양피지 위에 멈췄다. 심장 박동 불규칙. 시야 왜곡. 사흘 전 밤, 물방울이 떠올랐을 때와 같았다. 왼손이 뜨거워지고, 심장이 빨라지고, 시야의 가장자리가 흐려졌다. 물잔의 물방울 하나가 수면 위로 떠오른 건 그 직후였다.

우연의 일치일지도 몰랐다.

"이 결정이 그 에너지의 원천이라는 거야?"

"보고서는 단정을 안 했어.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까지만. 결정을 가져오려 했지만 채취에 실패했다고. 극도로 단단해서. 그리고 14명 중 결정에 직접 접촉한 세 명이 가장 먼저 죽었어."

카엘은 자기 왼손등을 봤다. 은빛은 보이지 않았다. 피부 아래의 온기는 여전했다. 미세하게 맥을 쳤다. 심장 박동과 다른 리듬으로.

리온이 양피지를 접았다.

"의뢰 발주자가 원하는 게 이 결정일 가능성이 높아. 금화 500이면 결정 하나 가격으로는 말이 안 되지만, 그 결정이 진짜로 미확인 에너지의 원천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져. 누가 의뢰했는지는 아직 중개소 익명이지만——"

"발렌이야."

리온의 입이 닫혔다. 반 박자 뒤에 눈이 좁아졌다. 금색 눈동자 안에서 계산이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어떻게 알아?"

"사흘 전 마르쿠스가 왔어. 복귀 제안. 금화 25 들고. 같은 날 리온 네가 금화 500짜리 균열지대 탐사 의뢰를 가져왔고. 노르비스 쪽 비밀 교섭을 하는 사람이 칼레온에서 한 명이야."

"……킥킥. 그래, 맞아. 추적해봤더니 발렌 아슈포드 쪽이야. 중개소 세 군데 경유했는데, 결국 칼레온 영주 직할 예산에서 빠진 금이더라."

리온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톡, 톡. 돈 이야기를 할 때 나오는 버릇.

"발렌이 결정을 원해. 노르비스랑 비밀 교섭하면서 에너지 이권을 확보하려는 거야. 결정 하나가 수십 일분의 연료 가치가 있으니까. 군수 이권의 80%를 쥐고 있는 놈이 새로운 에너지원을 손에 넣으면——"

"됐어."

카엘이 잘랐다. 리온의 말이 길어질 때 쓰는 방법이었다.

"거절이야?"

"발렌 의뢰는 안 받아."

"금화가 아니라 다른 이유로?"

카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리온은 더 파고들지 않았다. 둘 사이의 규칙이었다. 한 번 거부하면 물러난다. 리온이 양피지를 가방에 넣으며 일어섰다.

"보고서는 놔두고 갈게. 읽든 말든."

문이 닫혔다.

방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대장간 소리가 멈춰 있었다. 골목의 소음만 멀리서 들렸다.

카엘은 탁자 위의 양피지를 봤다. 읽지 않았다. 시선만 얹어두었다. 청백색 결정. 미확인 에너지. 접촉한 세 명이 먼저 죽었다.

왼손의 온기가 한 번 맥을 쳤다.


---

시장에 나간 건 라벤라를 사기 위해서였다.

오전의 하크라드 하부 시장은 사람으로 가득했다. 좁은 골목 양쪽으로 노점이 빽빽했다. 고기 굽는 연기, 향신료 더미에서 올라오는 매운 냄새, 무두질한 가죽의 지린내. 아이 둘이 골목 사이를 뛰어다니며 소리를 질렀다. 행상이 큰 소리로 값을 불렀다. 수레바퀴가 돌멩이를 밟아 덜컹거렸다.

카엘은 후드를 눌러 쓰고 사람 사이를 지나갔다. 관자놀이의 은색 머리카락을 가리기 위해서. 시장을 걷는 것은 싫지 않았다. 소음이 생각을 덮어줬다. 대장간 소리보다 더 철저하게.

라벤라를 파는 노점은 시장 안쪽에 있었다. 아낙이 마른 꽃 묶음을 줄에 매달아 놓았다. 라벤더 보라색과 캐모마일 흰색이 섞인 묶음. 세라가 조합했던 비율 그대로. 세라는 라벤더 둘에 캐모마일 하나를 넣었다. 그게 가장 오래간다고 했다.

"세 묶음."

"동화 12야."

카엘이 동화를 놓고 묶음을 받아 들었다. 코에 가져갔다. 향이 있었다. 라벤더의 쓸쓸한 향과 캐모마일의 부드러운 향이 섞여 있었다. 아직은 있었다.

묶음을 허리춤에 넣고 돌아서려는데 멈췄다.

발밑이 이상했다.

설명할 수 없었다. 발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진동이 사라졌다. 시장의 소음은 사람들의 발걸음과 수레바퀴와 대장간 울림이 만드는 진동을 바닥에 깔아놓는다. 그 진동이 끊겼다. 발바닥 아래가 죽은 것처럼 고요했다.

카엘이 고개를 들었다.

시장이 멈춰 있었다.

아이 하나가 공중에 떠 있었다. 뛰다가 정지한 자세. 오른발이 땅에서 15센티미터쯤 떨어진 채 공중에 머물러 있었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다 만 모양 그대로 굳어 있었다. 눈이 앞을 보고 있었다. 깜빡이지 않았다.

행상의 입이 벌어진 채 멈춰 있었다. 값을 부르던 중이었을 것이다. 입술 사이로 보이는 이가 하나도 움직이지 않았다. 옆의 손님이 지갑에서 동화를 꺼내다 만 자세로 서 있었다. 손가락 사이에 동화가 끼인 채.

수레바퀴가 절반만 돌아간 채 멈춰 있었다. 바퀴 위에 쌓인 먼지가 튀어 오르다 만 모양으로 공중에 정지해 있었다.

소리가 없었다.

완전한 적막. 대장간 소리도, 아이들 소리도, 행상의 호객 소리도. 바람 소리마저. 카엘의 심장 소리만 귀 안에서 울렸다.

왼손이 불타고 있었다.

카엘만 움직였다. 발을 옮겨봤다. 발이 움직였다. 고개를 돌려봤다. 돌아갔다. 숨을 쉬었다. 들숨. 날숨. 자기만 살아 있었다. 주변을 둘러봤다. 노점 앞에서 생선을 고르던 남자가 손을 뻗은 자세로 얼어 있었다. 손가락 사이에 비늘 하나가 반짝이고 있었다. 그 옆에 서 있던 여자의 치마가 바람에 날리다 만 모양으로 공중에 펼쳐져 있었다. 천의 주름 하나하나가 선명했다. 시간이 사진처럼 잘려 있었다.

그리고 봤다.

라벤라였다. 방금 산 묶음에서 꽃잎 하나가 떨어져 나와 있었다. 허리춤에서 빠져나온 것인지, 바람에 날린 것인지. 그 꽃잎이 카엘의 허리 높이에서 떠 있었다. 정지해 있는 게 아니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중력을 거스르며. 보라색 작은 꽃잎 하나가 공기 속을 헤엄치듯 부유하고 있었다.

카엘의 왼손등에서 은빛이 새어 나왔다. 피부 아래 혈관을 따라. 희미했다. 대낮의 햇빛 아래에서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분명 있었다.

심장이 뛰었다. 한 번. 크게. 흉곽을 때리듯.

꽃잎이 멈췄다. 카엘의 눈높이에서. 그리고 빛났다. 은빛 테두리가 꽃잎 가장자리를 감쌌다. 보라색 위에 은색이 겹쳐지며.

찰나였다.

혹은 한참이었는지도 모른다.

시간 감각이 무너져 있었다. 카엘은 떠 있는 꽃잎을 보고 있었다. 꽃잎은 카엘을 보고 있었다. 그런 느낌이었다.

소리가 돌아왔다.

한꺼번에. 대장간 타격음, 아이의 웃음소리, 행상의 호객, 수레바퀴 덜컹거림. 세상이 한꺼번에 재생 버튼을 누른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이가 착지했다. 행상의 입이 닫히며 다시 열렸다. 수레바퀴가 돌았다. 먼지가 땅에 떨어졌다.

꽃잎이 바닥에 떨어졌다.

은빛은 사라져 있었다. 왼손의 열기가 급격히 식었다. 평범한 보라색 꽃잎 하나가 흙바닥 위에 놓여 있었다.

"아저씨?"

라벤라 노점의 아낙이 카엘을 보고 있었다. 이상한 눈으로.

"괜찮아?"

"……그래."

카엘은 꽃잎을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손가락이 떨리는 걸 눌렀다. 돌아섰다. 걸었다.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갔다.

아무도 멈춰 있었던 걸 모르는 것 같았다.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아이는 계속 뛰고 있었고, 행상은 값을 불렀고, 수레바퀴는 돌았다.

카엘만 봤다. 카엘만 움직였다.

골목을 빠져나와 좁은 뒷길에 섰을 때 등이 벽에 닿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있었다. 무릎이 떨렸다. 손바닥을 벽에 짚었다. 돌의 거친 표면이 살을 긁었다. 그 감각이 진짜라는 게 확인될 때까지 손을 떼지 않았다.

숨을 고르는 데 시간이 걸렸다. 등 뒤의 돌벽이 햇빛에 데워져 따뜻했다. 그 온기가 실제라는 것을 확인했다. 발밑의 흙이 부츠 밑에서 바스라지는 감촉도. 멀리서 들리는 시장 소음도. 전부 진짜였다. 방금 본 것만 제외하면.

뭐였어. 지금. 뭐였어.

대답은 없었다.

---

여관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카엘의 발은 하크라드 성벽을 향했다. 성벽 남쪽 문을 나서면 풀밭이 이어지고, 완만한 언덕을 넘으면 묘지가 있다. 헤벨라 공동묘지. 돈 없는 자, 연고 없는 자, 전사자의 무덤. 비석은 작고 꽃은 없다.

성벽 문의 보초가 카엘을 봤다. 눈이 마주쳤다. 보초가 고개를 끄덕였다. 용병이 묘지에 가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다. 이 도시의 용병 중 절반은 묘지에 누군가를 묻어둔 사람들이었다. 보초는 묻지 않았다. 카엘도 말하지 않았다.

언덕을 올라갔다. 풀이 무릎까지 찼다. 오후의 햇빛이 비스듬히 언덕을 비췄다. 바람이 불어 풀이 한쪽으로 눕는 소리가 났다.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면 하크라드 성벽 너머로 굴뚝 연기가 올라가고, 멀리 칼레온 영지의 평야가 펼쳐져 있었다. 좋은 경치였다. 세라가 좋아했을 경치. 세라는 높은 곳에서 먼 곳을 보는 걸 좋아했다. 그것은 기억났다.

오래된 참나무 아래에 묘비가 있었다. 다른 비석들보다 조금 컸지만, 그것도 무릎 높이가 전부였다. 돌 표면에 새긴 글자.

'봄의 끝자락에 잠들다.'

카엘은 묘비 앞에 섰다. 3년간 셀 수 없이 온 자리였다. 참나무의 그림자가 묘비를 반쯤 덮고 있었다. 나뭇잎 사이로 빛이 점점이 떨어져 돌 위에 얼룩을 만들었다.

라벤라 주머니를 꺼냈다. 새것. 아까 시장에서 산 묶음에서 하나를 옮겨 넣었다. 코에 가져갔다.

향이 없었다.

시장에서 샀을 때는 있었다. 30분도 안 됐다. 카엘의 손에 닿은 이후로 사라졌다. 점점 빨라졌다.

주머니를 묘비 앞에 놓았다.

"향이 없어."

말했다. 묘비에. 묘비는 대답하지 않았다. 3년간 한 번도 대답한 적 없었다. 알고 있었다. 그래도 왔다.

"네 눈이 무슨 색이었는지 기억이 안 나."

바람이 불었다. 참나무 잎이 서걱거렸다.

"갈색이었나. 호박색이었나. 3년 전에는 눈 감으면 보였어. 지금은 안 보여."

목소리가 갈라졌다. 카엘은 입을 다물었다. 무릎이 풀 위의 흙에 닿았다. 언제 무릎을 꿇은 건지 몰랐다. 풀의 끝이 손등을 간질였다.

"머리카락이 변하고 있어. 손에서 빛이 나. 향이 사라져. 전부 다 이상한데 뭔지 모르겠어."

묘비의 글자를 봤다. '봄의 끝자락에 잠들다.' 세라가 좋아하던 계절이 봄이었다는 건 기억났다. 웃을 때 보조개가 패이는 위치도 기억났다. 왼쪽 뺨. 하지만 깊이가 떠오르지 않았다. 얕았나 깊었나. 기억의 해상도가 떨어지고 있었다. 윤곽은 남아 있지만 세부가 지워지고 있었다. 이것이 시간의 일인지, 아니면 자기 몸에 일어나고 있는 변화와 관련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다는 것이 가장 무서웠다.

카엘은 일어섰다. 무릎의 흙을 털지 않았다. 묘비 앞의 라벤라 주머니를 다시 집었다. 향이 없어도 이것은 세라의 것이었다. 세라의 손이 꿰맨 천이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해야 했다.

돌아서며 언덕 아래를 봤다. 하크라드 성벽이 보였다. 굴뚝에서 연기가 올라갔다. 평범한 도시. 평범한 하루. 카엘만 이상했다.

---

여관 1층 주막에 돌아왔을 때 해가 기울고 있었다.

주막 안에는 용병 서넛이 주사위를 굴렸고, 구석에서 누군가 에일잔을 기울였다. 주인 노파가 카운터 뒤에서 잔을 닦았다. 평소와 같았다.

카엘은 출입구가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습관이었다. 물을 시켰다. 노파가 물잔을 가져다주며 카엘의 얼굴을 한 번 봤다. 말은 하지 않았다. 카엘의 안색이 좋지 않다는 걸 읽었을 터였다. 이 노파는 묻지 않는 사람이었다. 30년간 용병들의 주막을 운영하면서 배운 지혜.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카엘."

익숙한 목소리였다.

고개를 들었다. 주막 입구에 남자가 서 있었다. 넓은 어깨, 낡은 가죽 갑옷, 잿빛 망토. 왼쪽 눈 위에 긴 흉터. 짧은 갈색 머리. 잿빛 여단의 부단장, 도리안.

카엘이 눈을 좁혔다. 도리안이 하크라드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잿빛 여단의 활동 범위는 칼레온 남부 쪽이다.

도리안이 맞은편에 앉았다. 의자가 삐걱거렸다. 도리안의 체격에 비해 의자가 너무 작았다. 노파를 보지 않고 손을 들었다. 노파가 에일을 가져다줬다.

한 모금 마셨다. 거품을 입술에서 손등으로 닦았다.

"걱정돼서 왔어."

카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소문 들었다. 균열지대 의뢰 받았다고."

"안 받았어."

"안 받았으면 됐고."

도리안이 에일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조급한 기색이 없었다. 할 말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정리된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타이밍을 재고 있는 표정이었다.

"발렌 쪽이라는 소문도 있어."

"리온 말이 빠르네."

"리온이 아니야. 내 쪽 정보도 있어."

도리안이 에일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잔 바닥이 나무를 두드리는 소리가 단단했다.

"3년 전에 네 부대원 37명이 죽었어. 세라도. 발렌이 미끼로 썼지. 그 놈의 의뢰를 받으면 안 돼. 받았으면 말렸을 거고, 안 받았다니까 그 얘긴 됐고."

전우 사이의 대화는 이런 식이었다. 돌려 말하지 않는다. 필요한 것만 말한다.

"왜 온 거야."

도리안이 카엘을 봤다. 흉터 아래의 눈이 담담했지만, 깊은 곳에 무언가가 깔려 있었다.

"네 안색이 좋다는 소리를 안 들은 지 3년이야. 그런데 요즘은 '이상하다'는 소문까지 돌더라. 머리카락이 변했다느니, 밤에 방에서 빛이 났다느니."

카엘이 손가락으로 물잔 가장자리를 눌렀다.

"누가 그래."

"여관 노파가 아는 사람한테 흘렸겠지. 이런 건 퍼지게 돼 있어."

침묵이 흘렀다. 주사위 소리가 주막을 채웠다.

도리안이 에일을 비웠다. 잔을 탁자 구석에 밀어놓고 일어섰다. 가죽 갑옷이 삐걱거렸다.

"어디 가."

"용건 끝났어."

카엘이 올려다봤다.

"그것만 하러 온 거야?"

도리안이 멈췄다. 잿빛 망토가 어깨에서 늘어져 있었다. 하크라드 주막의 기름 냄새와 에일 냄새 사이에서, 전장의 흙냄새가 배인 남자가 서 있었다.

"죽지 마."

한 마디.

카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도리안이 돌아서서 걸어 나갔다. 문이 닫혔다. 경첩이 삐걱거렸다. 남은 것은 에일 거품이 마르고 있는 빈 잔 하나.

카엘은 물잔을 봤다. 수면이 잔잔했다. 떨리지 않았다. 사흘 전과 달리. 하지만 왼손의 온기는 여전했다. 피부 아래에서 조용히 맥을 쳤다.

죽지 마.

전장에서 전우가 하는 말이었다. 무사히 돌아와라, 가 아니라, 죽지 마. 차이가 있다. 전자는 바람이고 후자는 명령이다. 도리안은 바라는 사람이 아니라 명령하는 사람이었다. 부단장답게.

카엘은 물을 마저 마시고 일어섰다.